1인 기업으로 살아남기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주어진 일은 없었지만, 뭐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친한 친구가 살았었던 동네가 익숙해서 근처 고시텔을 구했고, 100만원을 들고 짐을 쌌다.
가족에겐 걱정말라고 내내 밝은 얼굴로 떵떵거렸지만, 기차에 올라타자마자 눈물을 쏟던 때를 기억한다.
역세권. 신축. 개인 화장실 키워드만 확인하고 계약한 고시텔은 역을 기준으로 오르막길 15분을 걸어야 했고,
배정받은 방은 4층까지 걸어 올라가야했다.
책상과 작은 옷장, 침대 옆 화장실 그 사이엔 딱 두발로 서있을 공간이 남았다.
1평 남짓한 그 곳에서는 앞으로의 삶, 걱정 같은건 사치였고, 일단 매일 매일 나서야했다.
우선 할 수 있는 것.
당장 다음날 부터 일할 수 있어야 했다. 우선 이력서를 여러장쓰고 발로 뛰기 시작했다. 동네 한바퀴를 돌았고, 플랫폼 채용공고를 보며 할 수 있는 일, 해볼만한 일은 전부 이력서를 제출했다.
학생때부터 아르바이트 경력은 많으니, 서비스직은 자신있었다. 무엇보다 여러 일을 해보면서 자연스럽게 강점이 된 '적응력'을 믿었다.
그 중 압구정 근처의 대기업 레스토랑이 연락이 왔고, 면접을 보고 바로 다음날부터 일하게 됐다.
직원은 수십명, 크고 화려해보이는 이 곳에서의 일이라니. 이 곳이 서울이구나. 걱정 반 설레임 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게 주어진 일. 하고싶은 일이 아닐지언정 기쁘고 행복했다.
그 마음으로 열심히 했다. 적어도 여기서 1인분은 하기 위해서,
그러다보니 나름 인정받는 인재도 되었다. 레스토랑 직원에서 카페 직원, vip 전담 직원, 큰 행사도 곧 잘쳐내고, 신메뉴나 이벤트 기획도 재밌게 했다.
퇴근이 늦어 저녁이 없는 삶도 곧장 적응했다. 집보다는 방에 가까운 그 곳에 들어가는 것 보다는 좋았으니까.
'일단 한다.'의 무한 굴레에서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쉬는날에는 연습하고 오디션도 봤다.
동네 근처 24시 연습실에 계약하고, 가끔 퇴근 후 피아노에서 잠들기도 했다.
모니터링을 위해 촬영한 수많은 영상 속 나의 표정은 20대 초반의 풋풋함과 거리가 멀어보였다.
과거의 수많은 근심 걱정 한탄이 내 눈빛에 스며들어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의 나는 노래하고, 연주하는게 더 이상 즐겁지 않을까봐 내내 두려웠었고, 두려움이 현실이 되었을땐 오랫동안 인정하지 못했다.
"왕십리에서 크게 하는 축제 공연이야. 페이도 있어. 참가 해볼래?"
동창에게 연락이 왔고, 이런 공연기회는 흔치않으니 바로 참가의사를 얘기했고,
바로 밴드를 꾸려 연습에 돌입했다. 한 팀당 6곡씩은 할 수 있어서, 내가 하고싶은 구성으로 기획하고, 밴드 친구들 대학교 합주실로도 찾아가고, 일과 병행하면서 힘들었지만 할 게 있다는 건 나에게 엄청난 희망을 가져다 줬다.
시련은 그저 시련이다.
공연 일주일 전날 행사 주최 측으로부터 캔슬 통보를 받았다. 구청에서 소음 관련 민원제기로 인해 이전 행사가 중단되면서, 우리쪽에도 영향을 받았다. 이유가 타당해서 딱히 할말이 없었다.
잘못한게 없는데 다 내 잘못인것만 같아 팀에게 미안할 뿐이였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이 사건을 이후로, 더욱 미안할 짓을 안하고 살게 됐다. 남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고,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는게 내가 힘든것보다 비교안될 만큼 버티기 어려웠다.
행사와 계약된 공연 팀이 모두 모여, 주최 측에 피해보상에 대한 소송을 준비했으나, 결과적으로 잘 되지않았다. 내게 배당받은 희망도 같이 날라간 기분이였다.
이후에도, 오디션에서 연결되어, 한 PD님 밑으로 들어가 연습생을 기간을 거쳤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지. 하고싶은 것만 어떻게 하고 살래?. 기회가 오면 감사한 줄 알아야지.
너 다시 부산으로 내려갈래? 등 같은 팀 언니의 가스라이팅 속에서 스스로와 타협하고
무리하게 살을 빼고, 튀는 음색을 덜기 위해, 창법을 바꾸고. 무시와 강요를 밥먹듯이 받으며, 예뻐보여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새벽 2-3시까지 연습하고 지쳐 쓰러져 자면 다음날 9시에 회사에 출근했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나의 가치를 알아봐주었다는 감사함. 계속 노래 할 수 있음에 대한 감사함을 놓으면 안된다는 다짐으로 내내 버텼지만, 더이상 기쁘지도 희망적이지도 않았다.
그제서야 내가 완전 지쳐버렸다는 걸 인정하게 됐다.
고민과 실행
이런 저런 시련을 겪으며, 직업의 전환도 몇번 이뤘다.
할 수 있는 일 말고, 하고싶은 일에 대한 고민.
내가 좋아하고 하고자하는 음악. 그거 말고는 내게 뭐가 있지?
일하는 시간 빼고 매일 매일 생각했고, 유일한 취미이자 탈출구라고 생각했던 패션에 대한 열정이 선명히 드러났다. 한번도 일과 엮어 생각해보지 못했지만, 그만큼 좋아하면 할 수 있는거 아닐까. 근데 뭘 해야하지?
좀 더 전문적인 환경에서 배워보고 싶다. 브랜드에 들어가고싶다. 등 나름의 기준을 세워 이력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관련 이력은 당연히 없으니 자소서를 최대한 눈에 띄게, 그리고 대면 면접까지 간다면 신입의 패기로 밀어부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계획은 생각보다 빠르게 실현할 수 있었고, 글로벌 브랜드 세일즈를 관리하는 회사에 신입MD로 입사하게 되었다.
이직하고는 매일매일이 바빴고 새로운 일들의 연속이였다. 회의만 하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주어진 일이 없을 땐 내내 불안했다. 그 속에서도 오프라인 매장 오픈/철수 , 라운딩, 제품 패킹 등 몸으로 떼울 수 있는 일이라면 아주 열심히 했다.
회사에서는 내가 잘하는 걸 찾아주고 싶다는 핑계로 정말 모든 부서의 일을 다 한번씩 하게 했다.
"주임님은 시키면 다 곧 잘 하긴 하는데, 특별하게 잘하는 것, 못하는 것이 없는게 장점이자 단점이예요."
지금 생각하면 무한긍정으로 받아들였을테지만, 그때의 나는 저 말에 오래 좌절했었다.
우연히 PM. 그리고 운명처럼
1년 6개월 동안 정말 많은 일을 했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어떤 일에 흥미가 있고 없는지 대강 알게 되었고, 이후 중개 플랫폼을 준비 중인 회사로 온라인 MD로 이직했다.
거기서 4년을 일했고, 처음 PM이라는 직함을 얻게 되었다.
작은 회사였지만 프로덕트를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하고, 내외부 이해관계자 사이에서 설득과 조율을 하며, 기획도 디자인도 직접 맡는 사람. 적응력과 유연함, 그리고 높은 이해도를 바탕으로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사람으로 인정 받았다.
노래를 하며 쌓아온 깊은 자기 성찰과 관찰, 훈련의 시간, 그리고 매번 작은 프로젝트를 스스로 계획하고 실행하며 익힌 인내와 행동력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경험한 모든 노동이 내게 ‘일’의 감각을 주었고, 때로는 과한 열정과 좌절을 침대 밑에 숨겨둔 채, 살아가기 위한 차선의 길을 선택해 나아갔다.
그런 경험들이 쌓여, 나는 특별히 한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잘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필요한 일을 빠르게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는 폭넓은 역량을 갖춘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여러 회사에서 프로덕트를 기획하고 출시하고, 지금은 회사를 나와서 나의 브랜드로 이 일을 이어나가고있다.
내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쫓으며 살았던 시간을 지나
어린 시절부터 지켜온 가수의 꿈은 내려놓았지만, 매일 해야 할 일을 고민하고, 새로운 것을 기획하고, 사람들과 협업하며, 그것을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만들어내는 과정이 정말 즐겁다.
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수고가 필요하고, 나의 이름보다 제품명으로 결과물이 평가되지만, 이 일은 앞으로의 커리어를 그려 나가고 내 가치를 새롭게 정의해 준, 고맙고 소중한 직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