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때'를 믿는 신앙 이야기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도 교만도 아니하네. 사랑은 모든 것 감싸주고 바라고 믿고 참아내며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없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사랑은 성내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네.
흥얼대다 보면 뒤죽박죽이긴 해도 이 정도는 기억이 납니다. 고린도전서 사랑장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려주는 '사랑'의 노랫말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노랫말처럼 어려운 일인 듯합니다.
사랑의 막차
나는 초등 교사였기에 교직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웬만한 사람보다 많은 하트를 받아보았고, 나 또한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면서 '사랑'의 무게를 온몸과 마음으로 새로이 느꼈습니다.
단순한 남녀 사이인 아담과 하와의 사랑이 아닌, 선악과를 왜 먹었느냐는 하나님 물음에 '보내주신 여자로 인해 먹었다'라고 변명하던 아담의 이기적 마음이 섞인 얄팍한 사랑이 아닌 '네가 곧 나'라는 마음, 죽음을 대신할만한 지고한 진리의 사랑말입니다.
넷플릭스의 시즌물 '더 초즌'을 보며 '하나님의 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때'라는 것이 늘 우리에게서 드러나는 삶이라는 생각요.
사랑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사랑의 무게감에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 아직 하나님께서 진정한 사랑을 제게 주시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내게 사랑의 첫차는 있었던가?
첫차의 사랑이 내 마음에 진리가 되어 자리 잡았다면 나의 첫차는 곧 막차가 되었겠지만요. 그렇지 않으니 허풍 같은, 허상 같은 차들만 지나갔지요. 첫차는 언제 가버렸는지 기억에도 없고 오르락내리락하던 사랑의 중간 차들은 흉내쟁이들일 뿐이었습니다.
'나의 사랑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내 사랑이 흉내뿐이었음을 알까?'
미안함과 함께 몰랐으면 하는 마음이 큽니다.
문득 이제는 내가 타야 할 사랑의 차는 막차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할 마지막 사람 말고요. 이 마음을 채우는 사랑요. 탔다 내렸다, 혹은 주웠다 버렸다, 했다 말았다 하는 그런 거 말고요. 내 마음 가득 채우고 내 삶의 종착지까지 절대 내리지 않고 함께 할 의미로서의 막차 같은 사랑요. 외부의 대상이 아닌 내면의 마음이죠.
'내가 기다리던 사랑의 막차는 언제나 오려나... '
하나님을 기다리듯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바라면 뭐가 보이듯, 이제 저만치 플랫폼에 들어서는 막차가 보이는 듯합니다.
기다리던 막차가 도착하고 있습니다.
잔잔한 감동과 겸손한 마음으로 맞이하려 합니다.
나의 막차가 너무 늦은 걸까요?
시간으로 치면 오후 6시쯤 될까요?
아직은 해가 있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리 늦은 건 아니라 믿고 싶습니다.
이제 막 막차에 오를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합니다. 내 돌아갈 집까지 내릴 수 없는 막차임에 틀림없고 나는 이제야 긴장된 몸을 풀고 노곤한 기쁨에 젖어 달려갈 것입니다. 막차임을 확신하고 있으니 절대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간직할 것이며 못다 준 사랑들을 이끌 것입니다. 나의 막차가 그들에게는 적어도 나보다는 이른 막차가 되길 바랄 것이고 상심과 상실을 품을 수 있게 해 주렵니다.
돌아갈 귀갓길에 올라타는 사랑차는 내리지 않을 막차여야 하고 나는 6시쯤에 타지만 내 사랑하는 자식들은 정오쯤에 올라탄 막차이길 바랍니다.
곧 타게 될 내 사랑의 막차에는 어린아이부터 곧 종착지에 내릴 노인도 있을 테죠.
많이 늦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으렵니다.
진리를 아는 일은 사람에 따라서 꽤 어려운 일이니까요.
하나님의 때
사랑의 막차를 생각하며 하나님은 때를 통해 우리 삶에 드러나신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넷플릭스 시즌물 '더 초즌'을 보면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실 때, 예수님의 마음이 아닌 하나님의 때를 보셨습니다. 자주 말씀하셨어요. '때가 왔다' 또는 '때가 아니다'라고요.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는 12명의 남사도였으나 그 외에 따르던 여사도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보여주는 드라마 '더 초즌'에는 도마의 연인 라마가 나옵니다.
그리고 야고보가 둘인데 요한의 형제인 큰 야고보와 다리가 불편한 작은 야고보가 있습니다.
도마의 연인 라마가 집행관?퀸투스에게 살해를 당했을 때도 예수님은 속수무책 괴로워만 하셨습니다. 죽은 지 사흘이 지난 친구 나사로를 무덤으로부터 살려내신 예수님이요. 도마 외 몇 사도들은 그런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작은 야고보도 청했죠. 고질이 되어 사역에도 어려움이 되는 다리를 고쳐달라고요. 베데스다 연못에서 수십 년간 지내던 다리 병자를 고치셨고, 마리아조차 귀신에게서 구하셨고, 쉴라의 눈을 뜨게 하시는 등 혈루병, 소아마비, 벙어리, 맹인 등 많은 질병과 장애로부터 구해주셨고, 심지어 로마군 백부장의 자식을 고쳐주셨고 공회지기 야이로의 죽은 자녀도 살리는 등 많은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이셨으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던 라마와 야고보는 살리지도, 고쳐주시지도 못하셨어요.
예수님은 연인을 잃은 도마와 야고보와 함께 슬퍼하고 안타까워하셨지만, 그 또한 하나님의 때가 아님을 아시고 그 뜻을 따랐던 것입니다.
저도 하나님은 '때'로 일하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에는 다 때가 있음입니다.
이제 제게도 때가 온 것입니다. 사랑이란 큰 진리의 막차를 타야 할 때요. 60년 만에 말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시며 순종하셨던 '하나님의 때'는 저의 의도나 생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삶에 찾아오는 모든 기쁨과 고난의 일들이 '하나님의 때'에 따라 일어나는 일이라 이해하니 저는 그저 순종의 자세로 맞이해야 함을 알겠어요.
이 글을 읽으시는 님은 사랑의 막차에 오르셨나요?
문득 사랑의 막차라는 생각이 하나님의 때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러니 삶에서 실망할 일도 없고 희망을 접을 일은 더더욱 없는 것이죠. 바라고 믿고 참으며 조용히 기다리다 보면 반드시 때는 온다는 것이니까요.
참,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닉네임은 소망이고요. 이제 마지막 사랑을 얻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이 세상 끝까지 영원하며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했으니, 저는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