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의 과도한 순진함과 성인이 된 후의 냉소 사이에서
사람을 속절없이 믿어버리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스스로에게 떳떳했으므로 거짓의 가림막이 필요 없던 시절,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당당함을 연출하지 않아도 좋았던 그해의 나는, 타인 또한 나와 다르지 않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길을 묻는 이들에게 기꺼이 호의를 베풀고, 그들의 묘한 기운을 의심하는 대신 아이스크림을 사주며 웃던 시절. 그 순진함이 화근이었을까.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그들을 따라 '천(天)'자가 선명히 박힌 건물로 들어가 정체 모를 공부에 몰두하곤 했다.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치기 어린 호의는 가스라이팅이라는 세련된 폭력으로 돌아왔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 가출을 감행하고 이곳에 모든 것을 헌신해야 한다는 기괴한 논리를 듣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평범한 궤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음을 감지했다. 그러나 곧장 발을 빼지는 않았다. 그 부조리한 지식이 주는 생경한 즐거움이 있었고, 무엇보다 미지의 세계를 마주함에 있어 나는 지나치게 겁이 없었다. 당시 다니던 교회 청년부 목사님에게 '이단'에 대해 정보를 드려야겠다는 무모한 사명감까지 있었다.
결국 어머니가 그 건물 앞에서 절규 섞인 소동을 피우고 나서야 나는 멈췄다. 나의 호기심이 누군가의 불안을 그토록 예민하게 자극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당시 스무 살, 스스로 자신을 책임져야하는 성인이라는 명패를 달았지만 여전히 부모라는 보호막 아래서 머물러야했던 미숙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이제 거리에서 '도를 아십니까'라고 묻는 2인 1조의 행색을 마주하면 자연스레 그 시절의 잔상이 겹쳐진다. 한때는 그들의 삶에 깃든 비논리적인 의미를 탐구하려 애썼지만, 삶의 결이 다양해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진 지금의 내게 그들은 더 이상 미지의 영역이 아니다. 다방면으로 해석이 가능해진 그들의 독특한 삶에, 이제 내가 내어줄 궁금증이나 관심 따위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가끔, 그들의 열정적인 설득 앞에서 순한 눈을 하고 서 있는 젊은이들을 볼 때면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그 안에서 과거의 나를 발견하고는, 무심한 척 그들의 앞길을 막아서며 조용한 간섭을 건네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나는 타인에 대한 기대를 거두었고,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경계하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를 미워하는 냉소라기보다, 나의 소중한 시간을 타인을 위해 할애하고 싶지 않은 마음, 혹은 고요한 일상이 방해받는 것에 대한 피로감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조차 시간이 지나면서 본연의 나 앞에서는 맥없이 무너지고 만다. 결국 본래의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명제에 타인에게 순수한 시선을 가진 나 또한 속해있음을 안다.
길을 지나다니다 보면, 세월의 풍파를 숨기지 못한 채 '약자'의 형상을 한 이들이 눈에 띈다. 그들이 다가와 길을 물을 때, 내 안에서는 즉각적인 경계심이 든다. 그것은 타인의 삶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는 피로감이 빚어낸 마음의 거리였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요가 수업을 위해 약수역 6호선 환승로를 걷고 있었다. 굽은 등과 안으로 말린 어깨를 한껏 웅크린 한 노인이 내 앞을 막아섰다. 직업적인 강박이었을까, 그녀의 체형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한남동으로 가려면 이쪽 방향이 맞느냐는 질문. 평소라면 앞만 보고 지나치거나 건조한 대답만을 남겼겠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그 상황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그리고 마음 속 고여 있던 불편한 경계심을 깊은 숨과 함께 내뱉었다.
"한남동은 3호선으로 갈아타셔야 해요."
나의 대답 뒤에 돌아온 그녀의 반응은 예상치 못한 부끄러움을 안겨주었다.
"한강진으로 오라고 문자가 왔는데, 다들 바쁜지 말을 못 붙였어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물어보는 것조차 미안했을 그 노인의 마음을 마주하자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졌다. 그녀를 지나쳐 간 수많은 무관심한 등을 대신해, 나는 조금 더 온기를 담아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외쳤다.
"두 정거장 뒤에 내리시면 돼요!"
나보다 두 배는 더 긴 생을 통과해 온 그녀는 고마움에 고개를 깊게 숙여 인사를 전했다. 그 모습이 어쩐지 더 마음을 아리게 했다. 사람의 속내를 다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지만, 적어도 나를 향해 뻗어온 질문이나 도움의 손길에 그토록 차가울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매일 매트 위에서 수련하며 나는 근육의 긴장을 풀고 숨을 깊게 밀어 넣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정작 삶의 현장인 지하철역 한복판에서, 나는 타인을 향해 얼마나 마음의 근육을 수축시키고 있었던가. 낯선 이의 부름에 본능적으로 굳어버리는 내 마음은, 유연함을 잃고 딱딱해진 말린 어깨와 다를 바 없었다.
나를 보호하려 세운 경계라는 벽을 허물고, 타인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완의 상태. 그 노인의 등 뒤로 던진 나의 외침은, 어쩌면 나 자신을 옥죄고 있던 불필요한 긴장을 비워내는 짧은 날숨이었을 것이다.
세상은 여전히 모순투성이고, 나는 여전히 타인을 쉬이 신뢰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세상을 향해 속절없이 과잉 이완되어 있던 나는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어느덧 견고한 과잉 수축의 상태로 변모해 있었다. 타인에게 내어줄 에너지를 아끼고, 불필요한 개입을 차단하는 것이 어른의 유능함이라 믿으며 나는 스스로를 팽팽하게 조여 왔던 것이다.
이제 나는 그 굳은 매듭을 풀고, 내 마음의 정렬을 다시 맞추고 싶다.
내일의 수련에서는 오늘보다 조금 더 부드러운 '소망'의 결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