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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박하고도 Jul 29. 2017

이런 외국인 너무 좋아.

여행은 외국인의 문장을 수집하게 한다

written by 집순이


여행 중 만나는 외국인들은 하나같이 다들 좋은 사람처럼 보인다. 서로 약한 부분 캐낼 정도로 깊은 교제를 나누기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언어 능력에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겠지. 각자 좋은 점만 보여주면서 '이 친구 재밌는 친군데?', '똑똑한 친군데?' 정도의 이미지를 남기는 게 여행자들 사이의 베스트 인간관계일지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카우치 서핑으로 만난 집주인 알렉산드라는 영어를 잘 했지만 다른 현지인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 대형 쇼핑센터의 식당에 가도 영어 잘 하는 스텝은 매니저급의 직원 한두 명뿐.

러시아 사람들이 영어 못(안) 하는 것과 러시아와 미국의 정치 관계는 혹시 연관이 있는 거니? 조심히 물었을 때 알렉산드라는 "아니! 전혀. 모든 사람들이 다 영어를 잘 해야 할 필요는 없잖아? 우린 러시아 사람들인데."라고 답했다.

그렇지. 모든 사람들이 다 영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알아야 되는 건 아니지. 넌 러시아 사람, 난 한국 사람. 우리에게 제 2 모국어 같은 건 없는데 나는 왜 그런 질문을 떠올렸지. 멍청했다.

알렉산드라는 그녀가 수집하는 동전의 역사들, 근무하는 유치원의 보육환경, 신청해놓고 기다리고 있다는 미국 비자 등등 많은 얘기를 들려줬지만 지금 이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르는 그녀의 문장은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다 영어를 잘 해야 할 필요는 없잖아?"다. 응. 내가 잠깐 잊고 있었어. 그 기본적인 것을.


"이것 봐. 너무 예쁘지 않니?" 바이크 라이더인 알렉산드라의 또 다른 취미, 외국 화폐 모으기


아니 이것은.



가장 오랜 외국인 친구인 상게는 내가 네팔 여행 갔을 때 만난 여행 가이드이자 네팔과 한국을 오가는 NGO 운동가다. 상게는 네팔의 무능력하고 부패한 정부를 비난하면서 자신들이 네팔리안으로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말해주곤 했다.

"네팔 사람들이 대형 NGO단체에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 자신의 마을을 신경 쓰고 돌보고 더 좋은 곳으로 만들도록 도울 거야."

이게 벌써 육 년 전에 들은 얘기인데 그땐 이런 취지의 공동체(자신들에게 맞는 새로운 시스템을 스스로 만드는)를 성미산 마을 정도밖에 몰랐기 때문에 상게, 그리고 상게와 함께 하는 네팔리안들을 보면서 너네 장난 아니구나, 겁내 멋있구나 생각했다. 삐거덕 거리는 시스템 속에서 어떻게든 버텨내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와 사람들의 문화, 생활패턴에 벗어나더라도 새로운 시스템을 구상하고 실험하는 사람들. 넘나 섹시한 것.


그런데 내가 진짜 환장하겠다며 좋아하는 문장들은 따로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네팔의 힌두교, 이슬람교 문화유적지마다 빼곡히 들어찬 네팔리안들을 보고, 또 청소년들이 공공장소에서 영적인 분위기를 뿜어내며 성인식을 치르는 걸 보고 "너네 나라 학생들은 소풍으로 이런 곳에 자주 오지?", "와,  성인식이라는 의식이 실제 존재한다고? 멋있네." 말했을 때 상게의 대답 같은 것.

"요즘 애들은 이런 데 오는 거 지겨워해(우리네 경주 소풍 같은 거). 어쩔 수 없이 오는 거야. 성인식 저것도 애들은 하기 싫어하는데 친척 어른들이 전통이니까 하라고 해서 억지로 하는 거야."

상게가 얼마나 네팔의 종교와 문화에 대해 해사하게 웃으며 설명하던 아인데 그 얼굴로 "지겨워"라니. "귀찮아"라니. 그 순간이야말로 내가 종교 색채 가득한 나라들에게 갖고 있던 무지와 편견이 부서진 첫 순간이었다.

그렇구나, 너희도 귀찮은 게로구나! 뭐든 자주 하거나 억지로 하게 되면 귀찮고 싫지.

이 동상, 저 동상 사실 되게 비슷하게 생겼고 여기 말고 다른 데 가도 똑같이 생긴 동상들 얼마나 많냐. 그렇게 자주 둘러보고 싶은 곳은 아닐지도 모르지. 너희도 사람들 앞에서 웃통 벗고 이마에 이것저것 바르고 얌전하게 서 있는 것 좋아서 하는 게 아녔구나. 전통, 문화, 종교가 어떨 땐 귀찮기도 하고 그러는구나. 아고 좋아. 그렇게 말해줘서 내가 얼마나 기분 좋은지 넌 모를 것이다.


아, 더운데 이런 걸 시켜..



왜 기분이 좋냐면, 내게 좋은 이미지로 남아있는 외국인들은 하나같이 다들 모범적인 삶을 살고 있었는데 이런 문장들이 그들의 삶을 훨씬 더 입체적으로 만들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


*내가 만난 여행자들이 보여준 모범적인 삶:

반항해야 하는 존재에 반항할 줄 알고 경직된 삶을 싫어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토론하길 즐겨하고 책 읽는 것 좋아하고 일과 가정생활의 발란스를 유지할 줄 알고 흥미로운 육아 방법을 보여주고 몸에 좋은 음식을 찾아 먹고 도시보다 시골을 좋아하고 사람 많은 곳보다 적은 곳을 좋아하고 체형과 상관없이 자신이 입고 싶은 옷을 입고 타인에게 배울 점이 무엇인가 늘 찾으려 하는 똘똘한 눈동자 같은 것.


슬로베니아 블레드 호수에서 만난 벨기에 가족(부부와 네 남매)에게선 벨기에는 휴가가 2 달이고, 고등학생들도 밤 9시에 잠들 수 있는 교육 환경에 놓여있고, 아빠도 엄마도 애 키우면서 직장 다 다니고, 엄마는 파트타임 잡으로 보육교사하고, 아빠는 집에서 치료받는 환자들을 위한 방문 간호사로 일하고, 집은 2층짜리 단독주택이고, 국가가 사람들의 삶을 이렇게 튼튼히 뒷받침해주니 다들 애는 두세명 기본으로 낳고 등등, 아주 노-말-한 서유럽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또 서유럽, 북유럽 사회 시스템 얘기 듣는 거 되게 좋아하잖아? 이 가족이 머물던 커다란 텐트에서 같이 저녁 식사하면서 한창 재밌게 대화하는데 갑자기 엄마의 동네 친구라는 분과 그녀의 가족들이 나타났다. 한눈에 봐도 뭔가 느낌이 싸하게 다른 사람들.

그들은 같은 캠핑장의 가장 비싼 숙소에서 머무는 벨기에 가족이었는데 나랑 창연이 지나가면서 "저 성은 뭐냐" 했던 그런 숙소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했다고 이 가족들에게 알리러 온 것이었다.

우리와 놀던 가족들이 그들에게 우리를 소개할 때 그들이-특히 어머님이-어떤 경계의 눈빛을 보였는지 잊을 수가 없구나. 모든 시간이 지나가고 굿바이 인사할 때까지도 그녀는 우리에게나 자신의 가족에게나 친구 가족에게나 단 한 차례도 편안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총 성인 여섯 명과 아이 다섯 명이 디저트 시간을 가지면서 벨기에의 기쁜 이야기와 한국의 슬픈 이야기를 번갈아 나눴다. 나중에 온 식구들은 아홉시쯤인가, 우린먼저가겠어바바이!하며 숙소로 돌아갔다. 나는 응, 그래, 잘 가! 하고 손을 흔들어줬는데 그 가족들이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원래 우리와 함께 있던 식구들의 엄마가 내 어깨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왜그러시지, 귀를 기울였더니 "근데 있잖아. 쟤네는 우리랑 되게 달라. 이렇게 캠핑하는 거 완전 싫어해. 한 번도 안 해봤을 걸" 속삭이시는 것이었다. 어머, 어머님 좀전까지 친구분이랑 오붓하게 대화나누시더니 지금 친구 가자마자 디스 하시는 거예요? 음하하하. 나 그 맘 뭔지 알아요.

그러면서 남편을 가리키고는 "당신도 여기 오기 싫어했잖아. 당신도 이런 캠핑 싫어하지." 물었다. 지금 부부 싸움하는 것인가 흥미진진하게 쳐다보는데 남편이 "아니야, 나 좋아해. 난 말이야.." 하며 손사래를 쳐서 싸움은 시작도 못 했다. 재미없음.

이 가족들 캐릭터에서 종종 한국의 가족상을 보곤 했는데 예를 들면, 고등학교 다니는 첫째 아들이 엄마의 미숙한 영어가 부끄러운지 "엄마 영어 발음 별로야. 말 좀 많이 하지 마."라는 말을 우리 몰래 엄마한테 계속했던 모양이다. 엄마는 이걸 또 우리한테 일일이 다 고자질하면서 호호호호호 웃으셔. 마지막엔 "우리 아들이랑 영어로 대화 좀 많이 해줘." 학부모의 바람을 보이시고.

오, 서유럽 어머님. 시베리안 횡단 열차에서 열 살도 안 된 아들한테 계속 "게임 그만 해라, 이 영어문장은 어떻게 읽는 건지 한번 읽어 봐라." 채근하던 러시아 젊은 엄마 교육열 생각나요.


이 텐트에 침대 있고 방 있고 화장실 있다. 남는 방 하나 준댔는데 거절한 나, 왜 그랬지?



자다르 도미토리에서 만났던 브라질리언 84년생 디에고 오빠는 누가 봐도 자유로운 영혼, 아무에게나 먼저 말 거는 오픈마인드인데 그런 여행자들은 또 세계여행 경험이 꼭 있어.

이 오빠는 30살에 시작해서 32살까지 2년 동안 세계일주를 했다는데 스페인에 사는 여자 친구도 그때 티벳에서 여행하다가 만났다고 한다.

"여자 친구가 왜 좋아요?" 묻는 창연에게 디에고는 "그녀는 언제나 행복해하는 여자야. 모든 일에."라고 대답했지. 이야, 너무한 대답. 또다시 모범적인 캐릭터 등장 아니냐.

근데 디에고, 티벳가면 누구나 다 웬만큼은 행복해해요...

어쨌든 나랑 창연은 디에고가 매우 맘에 들어 3박 4일 내내 아침저녁으로 수다를 떨었는데, 그의 명어록은 여자 친구 자랑이나 브라질에 대한 얘기, 혹은 "누가 나에게 남미는 여행하기 위험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강대국들이 우릴 침략해서 폭력적이고 무자비하게 쌓아온 역사의 흔적인 것이라 대답해주겠다. 자기들 편한 대로 국경선 긋고 이 민족을 저 나라에 살게 하고, 한 민족을 두 나라로 갈라서 살게 하는 이런 행태가 훨씬 더 폭력적이고 위험한 것 아니냐?"도 아니었다. 내가 꼽은 그의 문장은,


"뭐? 뮌헨에서 100명이 자는 돔텐트에서 잤다고? 침대도 없이 맨바닥에서? 오우, 노우. 나는 그거 못 해. 옛날에나 가능하지, 난 이제 서른세 살이야. 난 늙어가고 있어. 오우, 노우."

"여행할 때 내가 묵던 도미토리에 10대 애들이 단체로 왔거든. 걔네들 밤새 술 먹고 놀고 다음 날 오만데에다가 토해놓고, 어떤 애들은 내 앞에서 섹스도 했어. 그렇게 노는 거 10대니까 가능하지, 난 아니야. 오우, 노우. 난 이제 서른세 살이거든. 늙어가고 있지. 오우, 노우."

"너네 캠핑 많이 했구나. 대단해. 난 침대가 좋아. 아이 라이크 침대."


자기는 축구 잘 못 한다는 디에고 말에 함박웃음 짓던 창연.



외국인의 입에서 저런 말들 "우리 아들이랑 영어로 좀 대화 많이 해줘요", "텐트는 피곤해. 침대가 좋지.(아니 너 세계여행씩이나 해놓고, 고작 2년 전에!)" 들을 때 난 너무 짜릿하여 그 말들을 수집해놓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인간이란 다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어쩜 이렇게 매번 새롭고 재밌는지. 그들에게 우리는 어떤 인간형이었는지도 궁금하다. 여행은 새로운 풍경과 새로운 인간'형'을 만나는 재미가 다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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