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쌀을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Written by 지랄방구
우리 엄마는 압력밥솥밥의 장인이었다. 쉭쉭쉭쉭 뚜껑에 달린 추가 돌아가다가 뜸들일때면 쎄에에에엑 김이 빠지는 소리가 났다. 별도의 타이머가 없는 압력밥솥이었는데 불을 줄여야할 타이밍과 꺼야하는 시점을 엄마는 귀신같이 알았다. 어릴땐 저녁에 티비에 나오는 아이돌에 집중 또 집중하다가도 쎅쎅 돌아가는 뚜껑 추를 보며 '저게 언제가 한번 빵 터질겨' 하며 네츄럴 본 쫄보 마인드 시전하다가도 '아 새로나온 저 걸그룹 예쁘네' 하고 이내 눈을 돌렸다. 그게 미쓰에이였나 에프터스쿨이었나. 후에버.
밥 짓는 도구의 역사란 신기하지 않을수 없다. 크게 나누면 '가마솥기-냄비밥기-압력밥솥기-전기밥솥기'로 나눠볼 수 있겠고 시대에 따라 밥 짓는 기술은 이전 시대의 이용자들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그러나 장기여행은 어쩔 수 없이 이 기술의 역주행을 경험한다. 쿠쿠는 만능이지만 내 백팩에 넣고 다닐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철기시대에 간석기를 쓰고있는 그런 상황. 밥짓기 도구는 정착생활을 하는 민족에 의해 기술발전이 되는 것이지만 어찌 우리 같은 유목민들이 뚜껑 닫고 버튼 한번 누르면 15분 만에 밥이되는 쿠쿠신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벼농사의 신께 제사 지내듯 뜨거운 불 앞에 죽어라 쌀을 저어줘야 하는 것이다.
여행 57일차 유일하게 얻은 기술이라곤 냄비밥 짓기 뿐이다. 전기밥솥시대를 사는 남조선 정착민들은 별 관심 없을수도 있겠지만 우리 같은 유목민들에게 냄비밥은 생존의 문제다. 나는 지난 50여일간거듭된 시행착오 끝에 비로소 냄비밥 짓기 마스터에 이르렀다. 냄비밥 짓기의 핵심에 대해 아래와 같이 썰을 풀어본다.
1.쌀을 불린다
요즘도 밥하기 전에 다들 쌀을 불리는지 모르겠다. 최소한 우리집은 쌀을 불리지 않았다. 쌀을 불리고 쿠쿠에 밥을 지어본 적이 없어서 불리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맛이나 효율성의 비교가 불가하지만 냄비밥의 쌀불리기는 필수코스다. 쌀을 불리지 않고 밥을 하면 쌀이 익는데도 오래걸리거니와 쌀에 수분이 없어서 그런지 밥이 약간 딱딱하게 익는다(고 한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컵에 쌀과 물을 넣고 기다려야 한다. 냄비밥은 인내심에서 시작한다.
2.물을 넣고 익힌다.
요즘 나오는 쿠쿠는 쌀량에 따라 물을 얼만큼 넣어야 할지 표시가 되어있다. 근데 이게 쿠쿠에서 준 계량컵 기준의 물량만 표시되어 있어서 계량컵 안쓰는 나같은 사람은 큰 의미없는 표시개다. 예컨데 쿠쿠의 계량컵 하나는 1인분을 의미하지만 우리는 모두 다 알고 있다 그건 너무 적다는 것을. 사실 우리 모두 물량 맞추는 도구 하나쯤은 다 갖고 있지 않나? '물은 손바닥을 올려놓고 손등과 손가락 만나는 곳까지' 이 진리의 가르침은 냄비밥에도 동일하게 적용 되지만 약간의 노하우가 필요하다.
3. 젓는다.
냄비밥의 하이라이트. 쌀을 끓이다가 물이 끓으면 왼손으로 냄비 손잡이 잡고 오른손으로 숟가락 잡고 미친듯이 젓는다. 언제까지? 물 다 없어질때까지...냄비밥의 물높이는 바로 이 과정 때문에 정설이 없다. 보통 밥할때보다 냄비밥할때는 물을 조금 많이 하라고들 말한다. 물을 너무 적게하면 밥이 익을때까지의 시간 확보가 안되기 때문. 그러나 그건 상황에 따라 너무 다르다. 내가 냄비밥을 올려놓은 불이 가스레인지라면 물을 약간만 더 넣는데 만약 유럽의 인덕션이라면 가스레인지보다 좀더 물을 넣는다. 왜냐면 보통 인덕션이 가스보다 최대치의 발열량이 더 높다. 그렇기에 물이 증발하는 속도가 빨라져서 애초에 물을 좀 더 넣는다. 이게 바로 짬에서 나오는 그루브다.
그럼 왜 저을까? 그것은 밥이 눌러붙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냄비밥 할줄 모르는 사람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이거다. 라면 끓이듯이 물넣고 쌀넣고 끓기를 기다리면 바닥은 타고 위에는 안익는 대참사가 일어난다. 쌀은 어떻게든 냄비바닥으로 달려가려고 한다. 수많은 정자가 난자에게 쎄빠지게 달려가듯. 우린 숟가락을 들어 달려가는 그것들을 퍼올리고 퍼올려야 한다. 정자는 난자를 만나 생명을 만들지만 냄비 바닥으로 달려간 쌀들은 붙어서 떨어질줄 모른다. 이때 붙지 않도록 쉬지 않고 젓는 것이 포인튼데 또 모르는 사람들은 저으라니까 냄비에 숟가락을 수직으로 세워서 휘휘 젓는다. 이것이 여행 고자의 길. 나도 여행 초기에 휘휘 젓다가 동행 아저씨한테 대차게 한 소리 들었다. 욕먹으면 다 한다. 이것이 나름 노하우라면 노하우.
4.뜸들이기
쿠쿠의 '뜸들이기를 시작합니다' 음성은 언제 들어도 섹시하다. 우리의 냄비밥도 뜸들이기 전에 최대한 뇌쇄적으로 '뜨음 들이기르을 시작합니다 하' 하고 외치는 것이 키포인트다. 거짓말 같지만 실제로 외치고 안 외치고에 따라 성공률이 하늘과 땅 차이다. 그리고 뚜껑을 덮고 불을 최소로 낮춘다. 이제 마지막 신의 한수가 남았는데 바로 언제 뚜껑을 열것인가 요거다. 이게 바로 냄비밥의 정수다. 모든 감각을 닫아버리고 후각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그 지점. '밥 냄새 맛있게 난다' 하고 열어버리면 밥은 여지없이 죽밥이 되버린다. 오히려 '어? 약간 탄내 나는데?' 하는 그 시점에서 1분 정도 더 기다리면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밥은 꼬들꼬들하고 가생이에 누룽지 노릇노릇한 황금비율 냄비밥이 완성된다.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윤오영의 수필 [방망이 깎던 노인]의 명대사.
아 이 수필 알면 내 또래 아재인데...
그 말이 맞다. 생쌀을 재촉한다고 밥이되나?
오직 냄비밥을 해본 자만이 이해하는 그 깊이.
오늘도 냄비밥을 짓고 숭늉을 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