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여행고자질
Written by 지랄방구
크레타섬에서 로도스섬 가는 페리 안 티비에서 익숙하지만 낯선 목소리가 들린다.
"더이상 미제의 도발을 좌시하지 않고 조국 통일의 력사적 사명을..."
그리스 뉴스에서도 김정은과 트럼프를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확실히 둘다 화가 단단히 난게 분명하다. 순간 혹시라도 지금 전쟁이 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거지? 졸지에 난민? 신한은행에 있는 예금들 스위스 은행계좌에 옴겨야 하는걸까? 라는 시덥잖은 생각을 하다가 하품이 나온다.
"여보 나 잠깐 한바퀴 둘러보고 올게"
선착장에서 큰일을 보고 왔어야 했는데 그냥 온 것이 문제였다. 4층부터 페리 화장실을 슬쩍슬쩍 보는데 화장실이 하나같이 더럽다. 되게 안가릴꺼 같이 생긴 나지만 화장실은 그래도 좀 가린다. 4층은 더러우니 3층으로. 3층에는 침대칸이 있는 층이다. 아무래도 돈 많이 내고 탄 사람들이 많으니 화장실이 깨끗할거라는 믿음으로 복도를 두리번 거린다. 근데 의외로 화장실이 없다. 혹시 침대칸은 화장실이 방마다 있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마주친 화장실. 좌변기칸 문을 벌컥 열었는데 안에 사람이 바지를 막 내리려고 하고 있다.
"오우! 쏘리!"
이봐 보통은 화장실에 들어가면 아무리 급해도 문을 잠그고 바지를 내리는 법이야 라는 말을 머리로만 생각한다. 영어로 작문하기에는 너무 복잡했고 어차피 바지남도 못알아 들을꺼라고 생각했으니...조용히 문을 닫고 그의 굿럭과 치얼업을 빌어주었다. 아 2층으로 가야 하나? 그렇게 화장실을 나오니 바로 앞에 리셉션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선원 유니폼 입은 젠틀맨이 나를 보더니 눈을 똥그랗게 뜨며
"Lim? 너 림이야?"
이러는거다. 오잉 내가 벌써 우주 대스타가 되었나? 어떻게 처음 보는 그리스 남자가 내 이름을 알지? 나는 벙벙하게 예쓰! 아이 엠 림! 했다. 그러니까 젠틀맨 선원이 대뜸 나한테 빨리 패쓰포트를 갖고 오란다. 엄청 다급한 표정으로. 뭐지? 내가 우주 대스타가 되기까지는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걸릴것 같은데... 패쓰포트는 또 왜? 패쓰포트를 가지러 갔다오는 길에 나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까 본 뉴스! 한반도를 불바다로 만든다는 정은이의 패기와 그에 맞춰 놀아나는 트럼프의 객기. 헉 그렇구나 바로 그거. 터질것이 터졌구나! 한반도가 불바다로?!?!!!
패쓰포트를 가져가니 젠틀맨은 바로 내 여권을 훑더니 봉투에서 뭘 주섬주섬 꺼낸다. 아 저것은 난민신청서를 꺼내는 것이구나. 전쟁이 나면 우리나라 은행 다 멈춰서 내 은행거래 다 멈추는데. 아 진작 스위스은행계좌로 예금을 옴겨놨어야 했는데. 이제 우린 그리스 난민수용소로 옮겨지고 무일푼으로 구호품이나 기다리는 신세가 되겠지. 젠장 대한민국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었어! 트럼프 새끼는 정은이같은 정신이상자의 이상현상에 놀아나갖구! 그 와중에 난민신청서를 영어로 쓸 생각에 골이 아프다. 맨날 헷갈리는 그거 LIM은 대체 펄스트 네임이야 랴스트 네임이야....
"Is this your visa?"
응? 그게 왜 거기서? 내 크레디트카드가 왜 거기서? 정확히는 '해외 ATM 수수료가 적어서 세계여행자들이 하나씩은 만든다는 하나비바G카드'가 왜 젠틀맨이 들고 있는 봉투에서 나온거지? 바로 사태파악이 안된 나는 리셉션 앞에서 카드를 들고 10초 정도 서 있었다. 왜 한반도가 불타오르는 지금 지중해 한가운데서 그리스 젠틀맨은 내게 신용카드를 주었나?
3일전. 우리는 크레타섬 항구에서 미리 로도스섬 가는 페리표를 샀다. 인터넷보다 2유로나 싸다고 역시 이런것이 여행자만 아는 팁이라며 우리 이제 프로 여행러 다 됬다고 서로 싱글벙글 하면서 우리의 소중한 '해외 ATM수수료가 적어서 여행자들이 하나씩은 만든다는 하나비바G카드'는 티켓오피스에 기부하고 그냥 나왔다. 티켓 오피스 직원도 두고 간 카드를 돌려줘야하는데 적어놓은 내 핸드폰 번호는 일시 정지 한지 오래. 그는 "고객님의 사정으로 일시 정지됐다"는 동방의 외계어를 들으며 "한반도의 전쟁으로 인해 이 번호는 정지되었습니다"라고 생각했을까는 무슨...그 동양놈들 되게 띨빵하네라고 생각했겠지. 그리고 그는 신용카드를 메뉴얼에 따라 페리에 타는 선원에게 인계했을 것이다.
내가 페리에서 지겹지 않았다면? 더러웠지만 선착장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고 페리에 탔다면? 침대칸 화장실 바지남이 조금만 늦게 배가 아팠다면? 나는 지금쯤 한국하나은행에 카드분실신고 하고 쌩난리를 치고 있겠지. 아니 바보같이 잃어버린지도 몰랐을겨. 어쨌든 결과가 좋으니 다 좋다. 신용카드도 내 손에 돌아왔고 한반도는 아직 덥지만 불바다까지는 아니다. 정은이도 트럼프도 나도 언제나 외국에서 신용카드 쓸 때는 조심 또 조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