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서 사라진 사소한 것들
written by 집순이
여행을 나와서 한국에서의 삶과 뭐가 달라졌나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어깨, 목이 자주 결리던 게 사라졌다는 것. 이건 뭐 별 거 아니고 지극 당연한 거겠지.
제일 큰 변화는 일상의 분노가 사라졌다는 거다.
친구가 아닌 타인을 대할 때 늘 긴장, 경계심을 조금씩은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집 밖에는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버스 탈 때도 이 안에 분노조절장애 가진 사람이 없길 매번 기도하고 지하철 플랫폼에 서 있을 땐 뻔뻔하게 내 앞이나 옆에 붙어 새치기 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길 바라야 한다. 짧은 치마나 깊게 파인 티를 입고 나갈 땐 5초 이상 빤히 쳐다보는 나이 든 사람이 나타나지 않길 바라고.
뉴스에서 사람의 이기심과 악랄함이 개입되지 않는 분야는 없다는 걸 확인할 때마다 크고 작게 분노했다. 정치가들은 시민들을 호구로 생각하는 것 같고 장사꾼들은 소비자들을 호구로 생각하는 것 같고 시청자는 연예인을 만만하게 생각하는 것 같고 연예인도 자기 팬들을 만만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럴 때마다 크고 작은 분노가 올라왔다. 인간이, 인간을 이렇게 무시하고 괴롭혀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나라라는 건가. 그래서 분노했다.
요즘 내 페북에선 사람들이 분노 표출할 구멍만을 기다렸다가 한 건수만 생기면 득달같이 달려든다는 말들이 종종 올라온다.
한국에서의 내 삶이 그랬다. 내 삶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의 삶도 그렇고. 그 화는 대부분 나랑 사적으로 전혀 관계없거나 나보다 약한 사람을 향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분노조절장애를 터트린다.
여행은 넓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대신 좁고 깊은 관계는 상대적으로 맺기 힘들게 만든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그 나라의 좋은 점, 나쁜 점을 다양하게 체험할 수 있지만 굉장히 나쁜 점은 내 재량에 따라 피해갈 수도 있다. 난 여행자니까 그 나라 국민에겐 일상일 나쁜 세금 제도를 겪을 일이 없고 치안이 안 좋은 나라는 아예 가지 않거나 짧은 기간 동안 덜 위험한 지역들만 골라다니는 방법도 있다. 한 나라에서 일상의 삶을 살며 겪을 수 있는 무수한 분노를 피할 수 있다. 그건 여행의 장점이자 함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겪은 며칠, 몇달의 시간만으론 삼십 년 넘게 살아온 한국과 쉽게 대조할 수 없는데도 자꾸 비교하게 되니까.
"사람 사는 게 어느 나라나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은 절반만 맞다. 다들 밥 벌어먹고 사는 거야 비슷하지만 그 밥 벌어먹을 때 생기는 고통은 나라마다 엄청나게 다를 수 있다는 것. 일상의 분노를 느끼는 정도도 나라마다 엄청나게 다를 수 있다는 것. 언젠가 외국에서 사는 날이 온다면 여행자로서는 전혀 겪지 않아도 될 고통, 분노를 느끼게 되겠지. 누구 말마따나 삶이 원래 지옥이고 고통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