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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박하고도 Jan 22. 2018

EP21. 새벽 3시 30분 깨지 말았어야 했다.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게

WRITTEN BY 지랄방구


새벽 3시 30분. 건조한 아타카마의 날씨 덕에 밤잠을 설치다 깼다. 6인 도미토리 여기 저기서 마른 콧바람과 자다 깨 물 마시는 소리가 들린다. 12시간의 시차. 계산하기 좋게 AM을 PM으로만 바꾸면 한국 시간이 된다. 문득 이 시간쯤 나는 회사에서 뭘했더라 생각해 본다. 딱히 오후 3시 30분이라고 정해진 루틴에 따라 어떤 일을 했다는 기억은 없다. 밥먹고 2시간 후 퇴근하기 2시간 30분전이라는 애매한 시간.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큰 일이 없으면 6시에서 6시 반에 나는 퇴근을 했다.

좋지만 무서운 시간_여행 중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

6시 퇴근. 그것만이 나의 유일한 야망이었다. 많은 돈을 버는 것도,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도, 성과를 내고 인정을 받는 것도 내겐 관심 무였다. 오직 정시에 퇴근해서 아내와 함께 저녁을 지어 먹고 자기 전까지 컴퓨터로 예능이나 드라마를 보거나, 라디오를 틀어놓고 각자 책을 읽다가 갑작스레 어떤 주제에 대해 열띄게 토론하다가 잠드는 밤. 그런 밤이 내 인생 희락의 전부였다. 어떤 목표도 없이 다니던 회사였기에 그만두는 것도 크게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다. 2012년부터 2017년까지 햇수로 5년 동안 어떤 해에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야근에 치어 쳇바퀴 돌듯 살아가던 시절도 있었고, 또 어떤 때는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하며 생각없이 출근했다 의미없이 퇴근하던 날들이 숱하게 있었다. 아마 전자가 3 후자가 7이었겠지. 세계일주가 아니더라도 나는 그곳을 떠나긴 떠나야 했다고 가끔 생각하곤 한다.

실하다

"나는 일할 때도 행복하고 싶어요" 덴마크 사람들은 어떻게 일하고 살아가는지 염탐하는 예능다큐에서 소설가 장강명이 했던 말이다. 퇴근시간을 정확히 지키고, 규정에 맞게 임금과 휴가를 보장하여 누구에게나 '저녁이 있는 삶'을 보장하는 덴마크의 이상적인 사회를 흠모하게끔 그린 그 프로그램에서 장강명은 다른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건드렸다. 우리나라처럼 비정상적으로 일하는 나라에서 '일하는 시간 동안의 행복'은 한차원 먼 단계의 말이었다. 직업인으로써의 행복이 단계가 있다면 첫번째 단계가 근로조건의 개선이고, 두번째 단계는 근로자의 자아실현이겠구나 생각했다. 가끔 "너 미쳤어? 회사에 자아실현하러 왔어?!" 하고 던지는 상사의 꾸지람 속에 굉장한 진리가 숨어 있었다. 자아실현이라는 단어가 주는 묵직한 이상과 현실. 떠나보니 문제는 그거였구나.

가이드 페드로는 매일 화산을 오르는게 업이다. 오를 때마다 그는 행복할까?사진은 동행자 에두와르도(이탈리아노)

그러나 직장을 갖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노말한 삶의 루틴 앞에 자아실현이라는 말캉말캉한 말이 대한민국에 아직도 남아 있능가. 그 삶도 너무너무 위대한 삶이라는 것을 알지만 고민없이 선뜻 그 길에 뛰어드는걸 나는 주저했다. 돌아가면 또 먹고 살기 위하여 만만한 업의 문을 두드리겠지. 나 하나 굶고 가난하게 사는건 참을 수 있어도 처자식 -자식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궁상맞게 사는 꼴 못본다는 되먹지않은 책임감과 타협하며 -물론 현실은 네게 타협조차 허락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 여행했던 날들은 한낯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며 살지도 모르겠다. 아니 알겠다.


여행 초반 "1년 후 내 인생은 반드시 바뀌어야 해" 하며 마치 이 여행을 인생의 스프링캠프라고 생각했었다. 7개월 남짓 지난 지금은 "바뀌지 않아도 괜찮다" 하고 내 자신을 타이르며 여행하고 있다. 이력서 특기란에 '타인과의 비교'라고 써도 될 정도로 언제나 타인을 관음하고 그들이 가진 것들과 내 인생을 비교하길 잘하는 나는 가끔 세계여행자들의 인스타에서 여행을 통해 만고의 진리를 깨우친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 '에이 뻥일꺼야' 하고 그들의 삶을 부정하면서도 '나만 의미없는 시간을 보냈나' 자책 한다. 자신감으로 가득찬 그들의 피드 넘어 남한테 말 못할 고민이 있기를. 내 자아실현의 시작은 타인의 망함에서 시작되는가. 그거 병이야 병.


새벽 3시 30분 깨지 말았어야 했다.

몸은 고되고 핸드폰 배터리는 닳아간다.

작은 창문 너머로 빠알간 자동차 불빛 하나 지나간다.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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