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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박하고도 Jul 26. 2017

EP5. 그리고 우리는 아테네에 가고 있다

그거면 됐지 뭐,

여행을 하며 좋았던 순간들은 가끔 바로바로 느껴지는 감정보다 숙소에 와서 침대에 누웠을 때 '아 맞아!' 하고 생각난다.


10시간이나 한 버스를 타고와야 했던 오늘. 새벽 6시에 출발한 버스는 오후 4시가 되서야 우리를 내려줬다. 차를 빌렸다면 4시간이면 왔을 그 길을 버스는 작은 도시들을 들러들렀고, 왕복 2차선의 좁디좁은 크로아티아의 해안도로에서 속도를 내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심지어 버스가 예정시간보다 한 시간 넘게 늦어졌지만 기사는 휴게소에 들러 식사하는 여유를 잊지 않았다. 간단한 식사도 아닌 샐러드에 메인 요리가 나오는 정찬을 먹으며. 휴게소에서 잠시 쉬어간다는 버스안내방송이 "좀 늦으면 어떠슈, 다들 산이나 보고 바닷바람이나 쐐면서 쉬고 있으슈"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크로아티아 하면 바로 떠올리는 경치는 '물'인 것 같다. 호수는 초록빛이고 바다는 뜨거운 태양 아래 반짝였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바다보다 아름다운 것은 산이었다. 크로아티아 산만의 독특한 모습은 완만한 경사가 이어지는 낮은 지대에는 풀과 나무가 우거지다가 갑자기 깎아 내지르는 절벽이 이어진다. 그러한 산들이 마치 성벽을 친 것처럼 넓게 이어지고 거기에 산 머리에 구름이 낮게 깔리거나 살짝 안개가 끼면 마치 거대한 자연의 신전을 보는 것 같다. 늘 그렇듯 사진으로 그것을 담을 수 없다. 글로도 부족한 그 때의 그 감정들.

크로아티아는 바다보다 산

그렇게 10시간을 달려 도착한 두브로브니크. 당장 숙소에 들어가 쉬고 싶었지만 우리는 터미널 대합실 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장기여행자의 여행은 그 도시를 여행하는 것 만큼이나 다음 도시를 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행에 오기 전에 작은 지도로 보며 '음 여기서 여기는 지도상에서는 짧으니까 하루면 되겠군' 생각했던 그 길이 막상 현장에 와보면 우리의 예상과는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게된다. 두브로브니크에서 아테네까지 하루면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그 길을 아무리 빨리 가도 3일이 걸린다는 사실을 이 곳에 와서야 확인하고선 우리는 당황했다. 지도는 평면이지만 그 평면의 길에 산이 있고 바다가 있고 심지어 정치적인 이유나 도로가 나 있지 않아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있다. 우리도 나름 고민하며 사이트와 어플을 검색하여 준비했지만 검색했던 버스 노선과 스케쥴이 실제 현장과 맞지 않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10시간의 피곤한 여정 이후에 우리는 대합실에 철퍼덕 주저 앉아 그리스로 가기 위해 알바니아를 거치는 해안선을 따라가야 할지 마케도니아를 통과하는 내륙 기차를 타야 하는지 알아본다. 어떤 길이 싸고 편한 길인지. 우리가 가는 길에 들러야 하는 도시에 머물게 되면 무엇을 볼 수 있는지. 치열하고 복잡하게. 그렇게 1시간 반을 대합실에서 길을 잃고 해맸다.


그런데 그 피곤했던 오늘의 일들이 숙소에서 생각해보니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차가운 바닥에 주저 앉아 피같은 3G데이터를 사용해서 버스 스케쥴을 검색하고 터미널 인포메이션 데스크를 왔다갔다 하며 그 스케쥴이 맞는지 틀린지 안되는 영어로 확인한 일. 종이를 꺼내 복잡한 여러가지 가능성들을 정리하고 줄을 쭉쭉 긋고, 서로에게 어떤 길이 좋을지 의견을 묻고 확인하는 그 순간들이, 크로아티아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는 일 만큼이나 훨씬 더 이 여행이 살아있는 것임을 확인하게 했다. 그리고 오늘과 같은 일이 한달 전에 있었다면 나는 당황했을 것이고, 집에 돌아가고 싶어지고, 미안해서 어쩔줄 몰랐을 것이다. 집을 떠난지 50일만에 여행의 긴장감과 치열함을 조금씩 즐기기 시작했다. 인류 전체가 아닌 한 인간도 살면서 진화하는 것이라면 여행은 그 진화의 속도를 굉장히 높여준다. 일상이었으면 안정된 생활속에서 10년 동안 경험하지 않았도 됐었던 일들을 고작 50일 동안 경험하게 되는 것 같다. 여행고자가 계속되면 여행교자가 된다.

모로가도 아테네만 가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아테네로 가고 있다.

"동무 날래 국경을 넘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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