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존재에게
“소피, 우리 이야기해 줘.”
“좋아, 프란시스. 우린 세계를 접수할 거야.”
- 영화 <프란시스 하>
불 꺼진 방. 소피와 프란시스는 마치 주문이라도 외우듯 희망 목록을 주고받는다. 파리에 별장을 사고, 명예 학위를 잔뜩 받고, 애인은 만들되 아이는 낳지 말자는 계획까지. 달빛도 들지 않는 실내이지만 두 사람의 꿈이 별자리처럼 퍼진다.
영화를 보며 언젠가 친구 K와 몽상을 속삭였던 밤을 떠올린다. “1층에는 카페, 2층에는 요가 스튜디오가 들어선 건물을 세우자. 우린 커피 향과 아로마 스틱으로 아침을 열고 저녁을 닫는 건물주가 되는 거지.” 그때 나는 치기 어리게도 순진했다. 불가능할 거란 단정은 내리지 않고, 그저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꺼내놓고 말했으니까.
가끔 그날 밤을 이렇게 되새긴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허락했던 그때가 가장 용기 있는 순간이었을 거라고. 창피할 만큼 허술했던 계획들, 아무 근거도 없이 내뱉었던 말들. 전부 바보 같아 보여서 부끄러울 만도 한데, 오히려 그 시절의 내가 사랑스럽다. 허무맹랑해도 괜찮다고, 그렇게라도 꿈꾸며 삶에 흠뻑 취하라고 내 마음을 밀어주던 때가 언제 또 있을까 싶어서.
현실은 몽상을 오래 허락하지 않는다. 전속 무용수가 되지 못한 채 안무가로 진로를 바꾼 프란시스처럼 K도 나도 각자의 방식으로 현실과 손을 잡기로 한다. K는 지방으로 내려가 직장을 다니고 나는 렌트비를 내며 요가 매트 위에 선다. 그렇다고 해도 실망스럽진 않다. 건물은 짓지 못했어도 내 몸 하나쯤은 가꿀 수 있으니까. 작지만 분명한 통제 가능성이 거기 있다.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나는 아직도 요가를 한다. 요가를 함으로써 계속 꿈을 꾼다. 오늘은 어설퍼도 언젠가 활처럼 휘고 가볍게 거꾸로 설 수 있을 거라고. 한계는 무너지기 마련이라는 전제를 품고 차분히 움직인다. 현재에 머무르면서도 미래를 상상하는 과정이 일어나고, 시간이 흐를수록 상상은 현실이 된다. 그렇게 나는 요가로 몸을 확장한다. 건물을 키우는 것처럼 살뜰하게. 오늘은 엘리베이터 공사 중인 4층쯤, 내일은 옥상 난간쯤. 그렇게 쌓아 올리다 무너지면 또 바닥에서 다시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나는 유연함 뿐만 아니라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프란시스의 성이 ‘할러데이(Halladay)’라는 사실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불안정한 삶을 뒤로 둔 채 새 직장을 구하고, 새 보금자리로 이사한 프란시스. 우편함 칸이 좁아 이름표를 접어 넣다 보니 ‘프란시스 하(Frances Ha)’라는 반쪽짜리 이름이 되어 버린 사연. 어쩌면 우리는 모두 어딘가에 조금씩 접혀 들어간 채 사는 건 아닐까. 다 펴지지 못한 꿈과 이름이 아쉽긴 해도 그 주름에 저마다의 사연이 스며들어 자신만의 무늬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접힌 종이를 다시 펼치듯 오래된 소망을 활짝 펼칠 수 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 흘러가는 물에도 결이 남고, 흐르는 구름에도 결이 남는다면, 흘러가는 나에게도 분명 결이 남을 테니까. 처음 꿈꿨던 모양과는 다르더라도, 그 또한 나의 별자리가 될 거라 믿는다. 그러니 오늘, 나의 세계를 접수하려 한다. 아흔 살이 되어도 매트 위에 서 있을 나를 꿈꾸며 몸을 구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