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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Dec 30. 2021

이방인이 만든 세계

<프렌치 디스패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만족할 수 없는 본능



본성이냐 양육이냐(nature or nurture) 논쟁은 유서 깊은 것이다. 인간의 모양은 본성에 의해 결정되는 걸까. 나는 본성 쪽의 손을 들어주는 사례를 본 적이 있다.


지인이 고민을 털어놨다. 온갖 방법을 써도 아이가 자신이 해주는 밥을 먹지 않는단 것이다. 당사자에겐 난제일지라도 다른 이가 볼 땐 간단한 경우가 있다. 이번 케이스가 그랬다. 그의 밥은 너무도 맛이 없단 걸 나는 알았다. 보통은 여러 맛을 비교하는 가운데 더 나은 맛을 알게 된다 생각하지만, 부모가 해준 밥만 먹은 세 살 아이가 단식 투쟁에 나선 것은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아기는 본능적으로 부모의 밥이 맛없다 느낀 것이다.


어떤 이는 만족하지 못하는 본성을 타고 난다. 그는 주변 모든 것이 가짜라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는 세상이 찬미한 것에 시큰둥하다. 날마다의 발버둥, 매일의 안간힘, 하루하루의 노고가 그에게는 무의미하다. 시시하니까, 별로니까. 사회가 제안하는 길은 하찮게만 느껴지니까.


그리고 견딜 수 없는 건 고통이 아니라 무의미한 고통이다. 만족하지 못하는 이에겐 생이 무의미하기에, 그는 삶을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힘들다. 주어진 어떠한 걸로도 그를 기쁘게 할 수 없다. 왜? 모두 거짓말 같으니까. 어느 하나 예쁘지가 않으니까. 그 무엇도 마음에 차지 않으니까.



무기력 위에 권태



아마 웨스 앤더슨 역시 흡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일 것이다.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는 앙뉘 쉬르 블라제(Ennui-sur-Blasé)란 도시에서 발간되는 잡지 '프렌치 디스패치’를 훑는다. 앙뉘 쉬르 블라제는 무기력 위에 권태(boredome on apathy)라는 뜻. 우리로 치면 심심민국 지루함시 지겨움구 따분함동 정도가 될까. 음료 ‘스프라이트’의 세계에는 맛있는 거 옆에 맛있는 게 있지만, 감독의 세계에는 무기력 옆에 권태가 있다. 앤더슨은 영화의 배경이 견딜 수 없는 무의미임을 시작부터 분명히 한다.


잡지 창립자이자 편집장인 아서 하위처 주니어(빌 머레이)가 심장마비로 죽는다. 그는 잡지 그 자체였기에 ‘프렌치 디스패치’ 역시 안락사에 처해진다. 이번 호는 잡지의 마지막 심장 박동이자 폐간호이다. 각 분야 최고의 필진이 편집장의 부고를 실을 특집호에 기사를 작성한다. 이번 호엔 지역의 색채, 예술과 예술가, 정치와 시, 맛과 냄새 섹션이 담길 예정이다.


지역의 색채를 담당한 이는 어브세인트 새저랙(오웬 윌슨). 그는 앙뉘 쉬르 블라제의 면면을 독자에게 전한다. 매일 8-9구의 변사체가 강을 떠다니고, 낮에는 어린아이가 노인을 구타한다. 도시의 젊은이 대부분은 겸직 중이다. 낮에는 무직자로, 밤에는 창남과 창녀로 일하는 것이다. 관용과 포용의 도시답게 앙뉘 쉬르 블라제는 모든 야생동물, 기생충, 넝마주이를 껴안는다.


다시 말해 이 도시는 최악이다. 권태로우면서도 끔찍하다. 지겨움 위에 지겨움이 있는 동시에 구타와 살인과 매춘과 더러움이 존재한다. 지루하면 평화롭기라도 해야 할 텐데, 참혹하면 역동성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앙뉘 쉬르 블라제는 어느 하나의 위안을 허락하지 않는다. 영화는 무기력하고 끔찍한 세계를 다룬다.


편집장은 독자를 대변하여 새저랙에게 묻는다. 꽃이나 미술관처럼 예쁜 장소를 담아보자고, 다른 사람도 생각하자고. 하지만 새저랙은 단호하다.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단 거다. 그는 기사 한편에 자신 또는 감독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적는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저마다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시작은 휴가에서 비롯된다



비밀은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드러나지 않은 것은 감춰져 있다. 다시 말해 아름다움은 세상에 나타나지 않은 것, 일상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웨스 앤더슨은 비밀을 찾으려 한다. 문제는 그가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형태의 인간이란 것. 그는 전원주택을 지을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까 자연의 고즈넉함을 찬양할 타입이 아니란 거다. 그는 <쿵푸팬더>를 보며 눈물 흘릴 위인이 아니다. 다시 말해, 미래는 미스터리이고 과거는 히스토리이지만 현재는 선물이라 읊조리며 눈물을 흘릴 타입도 아닌 거다. 기존의 것이 성에 차지 않는 사람에게 허락된 방법은 하나다. 바로 전에 없던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구축하는 것이다.


“시작은 휴가에서 비롯되었다.” 영화의 첫 대사이다. (우리는 이 말이 사실 작품의 끝에서야 뱉어진 말임을, 그러므로 웨스 앤더슨의 세계는 끝에서 처음으로, 처음에서 다시 끝으로 이어지는 완결된 형태임을 나중에야 알게 될 것이다. 그의 세상은 세계의 일부라기보다는 별도의 세계이다.) 어글리 코리안은 사실 코리아에서 가장 얌전한 사람이다. 민원에 시달리면서도 어느 곳에도 울분을 토할 수 없는 공무원이나, 자신을 알아보는 이가 없을 때 난리를 피우는 것이다. 평소에 쌓인 게 없다면 굳이 휴가 중에 난동을 일으키진 않는다. 일상의 하나하나가 전부 싫었던 감독은 바캉스 장소의 모든 걸 아름답게 만든다. 심지어 찻쟁반에 찻잔을 얹는 장면조차도. 하물며 영화를 찍는 감독 자신까지도. (감독들의 유니폼과 같은 소위 ‘돕바’는 웨스 앤더슨에게 남의 나라다. 그는 항상 면수트를 입고, 넥타이를 매고, 머리를 가지런히 하고, 데저트 부츠를 신은 채 영화를 찍는다.)


파스텔 톤의 색감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든지, 카메라 한가운데 인물이 있다든지, 완벽한 좌우대칭이라든지, CG보다는 직접 만든 소품을 활용한다든지 하는 웨스 앤더슨만의 인장이 <프렌치 디스패치>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번에는 화면이 분할된다는 것, 화면 비율의 바뀐다는 것, 흑백과 컬러를 오간다는 것, 애니메이션을 도입했다는 것 등의 기법이 추가되었다.



이방인이 만든 세계



‘프렌치 디스패치’의 첫 번째 기사는 도시의 풍광을 담고 있고, 두 번째는 폭력성과 천재성을 지닌, 수감된 화가와 그의 뮤즈 그리고 둘을 둘러싼 미술계 인사를 다룬다. 셋째 기사에는 체스판 혁명을 주도하는 학생 그룹과 그들을 취재하는 언론인의 이야기가 실려 있고, 마지막엔 경찰서장의 아들이 유괴된 사건과 장인정신을 지닌 경찰서 요리사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앙뉘 쉬르 블라제란 도시에서 벌어진 얼핏 보아서는 상관없는 미술, 정치, 요리 에피소드가 나열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이들 모두가 감독과 같은 처지, 즉 일상에서 휴가를 떠난 자라는 점, 일상이란 모국을 떠나 자기만의 왕국을 찾아 나선 여행객이란 점이다. (영화의 끝에서 요리사는 자신이 외국인임을, 이방인임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모세 로젠탈러(베네치오 델 토로)는 현실이란 옷이 맞지 않다고 느낀다. 그에게 일상이란 벗어나고 싶은 또는 잡아 패고 싶은 무엇에 불과하다.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그는 일급 살인을 저질러 감옥에 수감된다. 하는 일 없이 구강세정제를 10년 간 마시다가, 간수이자 뮤즈인 시몬(레아 세이두)을 만나 그림을 그린다. 아름다움을 그릴 때엔 삶이 그럭저럭 견딜 만하지만 그 외에는 여전히 죽고 싶은 생각뿐인 로젠탈러에게 시몬은 말한다. 봄에도 그리고 여름에도 그리고 가을에도 그리면 겨울쯤에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그게 싫으면 사형 의자의 스위치를 내리면 된다고.


세 번째 기사의 인물들도 영역이 다른 로젠탈러들이다. 혁명 선언문을 쓰는 제피렐리(티모시 샬라메)는 문자 그대로 기존 세계를 뒤엎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 하며, 기자 크레멘츠(프란시스 맥도맨드)는 그러한 과정을 면밀히 취재한다. 크레멘츠가 쓴 기사 제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전적으로 미래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무엇에 산다.” 그리고 이때의 미래란 만들어가야 할 세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웨스 앤더슨의 목소리가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현재와 불화하도록 만들어진 사람, 여기/지금이 잘못됐단 건 알지만 어디로 나아갈지는 모르는 사람, 결국 찾아야만 하는 자신의 세계를 향하는 사람, 그러한 사람의 이야기가 직접 드러나는 것이다. 요리사 네스카피에(스티브 박)는 독이 든 무 요리를 먹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풍미가 있었다, 딱히 유쾌하지도 않고 맹독성이었지만 새로운 풍미였다, 난 외국인이자 이방인이다, 빠뜨린 뭔가를 찾아 헤매고 두고 온 뭔가를 그리워한다. 결국 감독이 찾고자 하는 건 독이 있을지라도, 딱히 유쾌하지 않을지라도, 이 세계에 없는, 전에 존재한 적 없는 무언가다. 다시 말해 자신만의 스타일, 자기만의 환상, 나만의 이야기이다. 그게 아니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간수 시몬이 로젠탈러의 그림을 펼칠 , 제피렐리가 뜻을 같이 하는 이와 춤출 , 사람들이 네스카피에의 음식을 먹을 , 흑백의 세계에는 색이 스며든다. 이유 없는 어지러움, 근거 없는 역겨움, 탈출의 욕구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 막막함을 동시에 느낀다면, 웨스 앤더슨처럼 해볼 일이다. 여기서 금지되는 것은 자기 비하이다. 죽느니, 사느니 하는 것만은 금지된다. 편집자 방의  위에는 <프렌치 디스패치> 원칙이 적혀 있다.


눈물 금지(no cr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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