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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Dec 31. 2021

매일이 같다는 학생에게 보내는 편지 1/2


xx 씨에게


안녕하세요. 모든 게 궁금하다고 말하는 듯한 눈, 그만큼 큰 안경 프레임, 그리고 토론할 때 상대의 어디를 봐야하냐는 xx 씨의 질문이 기억하네요. 그런 질문은 처음이었거든요! 요즘은 상대방과 이야기할 때 어디를 보는지요?


수능을 다시 보거나 편입을 했겠군요. 어떤 것이든 쉽지 않은 과정이었을 텐데 대단하네요. 깊고 깊은 7호선 에스컬레이터보다는, 얕으면서도 교정과 바로 연계되는 2호선의 출입구가  산뜻하죠. 강남 4구를 참칭하는 동작구보다는 힙한 성동구가  멋지기도 하고요. 저는 한양대 후문 ? 왕십리   미쳐서 있는 수제비 집을 좋아해요. 기숙사 쪽으로 나가서  걷다보면 나오는 족발 골목도 멋지고요. 한양대의 학생 식당은…. 어쨌든 본인이 원하는 것을 이뤘다는 면에서 축하를 보냅니다.


누구 못지않게 무의미한 시간을 보낸 사람이라서 삶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생각을 하고 있어요. 다행이네요. 몇 마디라도 할 수 있어서. (쓰고 보니 말이 이상하네요. 다행이네요, 잉여라서. 운이 좋네요, 무가치해서. 행운입니다. 재활용이 되지 않아서, 처럼 말이지요.) 요즘의 생각을 적어볼게요.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에는 빈틈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균열을 메울 수 있을까 고민 중이에요.


사진은 다음의 작품 중 일부를 찍은 것 박서보, <묘법(描法)> No.228-85, 1985. 캔버스에 연필과 유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연말마다 각종 시상식이 열립니다. 많은 사람이 열광하고요. 특히 대상 수상자는 많은 이의 찬사를 받습니다. 연말과 연초는 거의 그들의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고요. 그런데 대상은 왜 값진 것일까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어서일까요? 어느 정도는 그럴 겁니다. 하지만 대상 수상자가 100명이라면 어떨까요? 대상 외에 초대상, 초초대상, 슈퍼대상, 울트라대상 등이 있다면? 대상은 유일하고, 그 자체의 가치를 가진다는 면에서 값집니다. 그리고 동시에 최우수상, 우수상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회색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회색만의 특질이 존재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회색으로만 된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회색을 파악하지 못할 겁니다. 회색은 흰색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검은색과 다르다는 면에서, 다른 여타의 색이 아니란 차원에서, 자신의 색인 회색을 드러냅니다. 회색은 자신만의 색, 즉 유일한 색인 회색을, 다른 색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의미 있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의미로만 충만한 천국으로의 이민을 통해서? 동물적 세상에서 실존적 세계로의 이주로? 그러니까 의미 자체로 우리가 쑥! 하고 들어가는 걸까요? 의미가 우리 안으로 팍! 하고 들어오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하고, 값지고, 의미 있는 일만 있다면, 우리는 눈앞에 유의미함을 파악하지 못할 겁니다. 연예대상 참가자 모두가 대상 수상자라면 대상이라 할지라도 값지지 않은 것처럼요. 모든 게 회색이라면 그 어떤 것도 회색이 아닌 것처럼 말이지요. 모든 것이 의미라면 그 어떤 것도 의미있지 않습니다. 의미 있다는 것은, 그것만의 특징을 가져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반드시 무의미한 것을 요구합니다.


다음 세 개의 예시는 모두 우리가 수업 시간에 나눈 이야기입니다. 1)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라는 훌륭한 예문이 알려주는 것처럼,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는 의미는, 띄어쓰기라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을 반드시 필요로 합니다. 의미는 무의미에 빚지고 있습니다.


2) 어떤 이가 장자를 비난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말은 모두 무의미하다고. 장자는 반문하길, 당신이 걷기 위해서는 당신 발만큼의 땅만 있으면 족하다. 그러나 정말 당신 발자국만큼의 땅만 띄엄띄엄 있다면, 당신은 아마 걷지 못할 것이다. (무서울 테니까!) 쓸모없음의 쓸모(무용지용無用之用)가 있다. 그렇다네요.


3) 연인 간에 시종일관 ‘중요한대화만 한다면 그만큼 끔찍한 일은 없을 겁니다. 인류의 미래에 대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관해, 세대 격차와 혐오 문화의 확산에 대한 토론만으로 가득  있는 연인 관계는 있다면 재앙이고, 다행히도 불가능합니다. (제가 남자라서 멘스플레인이라는 재난을 놓치는 걸까요? , 멘스플레인이 지속되면 연인 관계는 끝날 테니까요.) 연인은 둘이 공유하는 말도  되는 농담, 기억조차 나지 않는 낄낄거림, 습관과도 같은 울먹거림, 어제  먹었다는, 같은 학과 아무개가 정말 짜증난다는 그러다 며칠 뒤에 걔가 아니라 다른 애가  싫다는 등의 허튼 소리 속에서만 성립합니다. 중요한 것은 중요하지 않은  속에서만 피어납니다.


사진은 다음의 작품 중 일부를 찍은 것 박서보, <묘법(描法)> No.43-78-79-81, 1981. 캔버스에 연필과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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