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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Dec 31. 2021

매일이 같다는 학생에게 보내는 편지 2/2

“매일”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과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엄밀히 말해 불가능합니다. 만약 정말 다른 사람과 똑같은 생활로만 자신의 삶을 꽉 채운 사람이라면, 남들과 똑같다는 생각조차 떠올릴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 생활의 대부분은 반복되고, 지루하며, 무의미합니다. 그래서 몇 안 되지만, 생동감 있는, 유의미한 경험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저는 권위가 없으니까 권위에 호소해볼게요. 유서 깊은 격언이 있거든요. 카르페 디엠Carpe diem(seize the moment/day)! 바로 현재를 즐겨라!


보통 이 말은 다음날에 시험을 앞둔 대학생들이 쓰는 말로 알려져 있는데요. 수십 억 대학생의 든든한 후원자 위키백과의 말을 들어봅시다.


[카르페 디엠은] 호라티우스의 “현재를 잡아라, 가급적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의 부분 구절이다.


이런! 시험을 앞두고 놀고 있는 대학생을 위로하는 말은 아니겠네요.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다가, 내일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다가, 시험장에서 ‘참교육’을 당한 경우가 얼마나 많았나요? 대학 생활에서 배우는 점 중 하나는 우리가 시험을 바라지 않아도 시험은 반드시 오고야만다는 점이겠지요.


더 나은, 더 값진, 더 의미 있는 순간(내일)을 믿기보다는, 비슷하고, 쓸모없고, 무의미해보여도, 지금을 잡아야 한다는 것.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 “삶으로부터”, 그러니까 여기·지금으로부터 “다시 떠오르기.” 철저하게 상에서 배제되어봐야 상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검은색, 흰색을 보아야 회색을 볼 수 있습니다. 지겨워야 청춘입니다. 옛부터 푸르다靑와 봄春은 모두 값진 것을 의미했다고 해요. 지겨움을 느껴야 소중하단 뜻일까요? 많은 실패가 제게 알려준 것은, 처음부터 혹은 처음 본 상대에게 사귀자는 얘기를 해서는 상대와 사귈 수 없다는 사실이었어요. 일상을 공유하는 데 성공하면 그나마 상대와 교제할 수 있었지만요. 무의미를 나눠야 의미 있는 관계가 시작됩니다. 또 많은 소주와 맥주 그리고 특히 막걸리와 와인이 제게 일러준 것은, 도취와 숙취는 세트라는 점이었습니다. 기쁨은 고통과 엮여있습니다. 생동감은 지루함과 짝이고요.


의미는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무의미를 필요로 합니다. 고양의 순간은 지루함을 요하고, 반짝임은 가려져있음을 요구하며, 실존은 일상을 그것도 지겨운 일상을 요청합니다. 지금의 무의미함이 의미의 윤곽이 되어줄 거예요. 최소한 저는 그렇게 믿어요(아마 학생이 “저는 그렇게 믿어요”라고 썼으면, 저는 입증 책임을 회피하는 논법이라고 좋지 않다고 지적했겠죠? 이럴 때는 선생이라는 직업이 참 좋네요. 하하).


사진은 다음의 작품 중 일부를 찍은 것 박서보, <묘법(描法)> No.18-81, 1981. 캔버스에 연필과 유채, 국제갤러리 소장.

물론 어렵죠. 그리고 싫은 말이기도 해요. 일상에 충실하기 보다는, 슈퍼 히어로가 나타나서 한 번에 해결해줬으면 좋겠어요. 여기 의미야! 잔뜩 줄게! 그리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happily ever after). 얼마나 좋아요? 저는 철학과 출신인데, 학부 졸업 때 가장 듣기 싫은 말은 이런 거였어요. 철학과는 어디에도 취업을 할 수 없으니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반문했죠. 그럼 네가 철학과 졸업장 가지고 내가 너의 졸업장 가질게. 난 자유보다 구속을 좋아하니까 그냥 명문대 경영학 학위를 줘. 숱하게 따져봤지만 결국 불가능한 일이었죠.


분명 삶은 지겹기도 해요. 그리고 모든 사람은 쓸모없는 짓을 해야만 하고요. 그러나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정말로 의미 있을 때가 있어요. 그리고 이런 순간을, 그러니까 자기 존재를 흠뻑 느끼려면, 죽어있는 듯한 느낌을 겪어봐야‘만’ 합니다. 쉽지 않지만요. 그래도 의미를 깁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나을지도 몰라요. 제가 좋아하는 책의 한 대목 인용해볼게요. ⟪모든 것은 빛난다⟫란 책의 에필로그에 실려있어요. 강조는 제가 한 것입니다.


"모든 게 빛나진 않아. 그러나 빛나는 모든 것은 빛날 거야(Not everything will shine, but all the shining things will shine)."


그리고 빛나는 것을 보려면 어두움에 있어 봐야 하고요. 잘 견디다가, 놓치지 말고 잡아봐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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