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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Jan 05. 2022

생활이란 통 속에서 나는 울부짖었네

<파이란>

1.



<파이란>은 2001년에 개봉했다. 당시 나는 스무 살이었고 아는 것이 없었다. 아는 만큼 본다. 무식(無識)은 지식이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인식(認識)의 무능도 뜻한다. 인천 공단을 안개의 도시로 생각했을 때, 나는 미세먼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알지 못한다는 게 불행만은 아니다. 누가 나를 향해 “퍽 유”라고 해도 내가 알아듣지 못한다면 기분이 상할 일도 없다. 누군가 내게, 너 그렇게 살면 실패한다, 라고 해도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무지성’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스무 살의 나는 낄낄 대면서, 마찬가지로 낄낄 대는 친구와 함께 <파이란>을 봤다. 이강재(최민식)에게 감정 이입을 하면서도 용식(손병호)의 말이 재밌었다. 아마도 나는 강재가 우스웠던 것 같다. 강재는 유치장에서 풀려나자마자 오락실에서 시간을 때우다 보스 용식에게 두들겨 맞는다. 용식은 마치 석학 한나 아렌트처럼 강재에게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강재야, 강재야, 이 시발 강재야. 생각 좀 하고 살자. 생각 좀 하고 살아. 생각 좀.”


이제는 생각한다는 게 무척 힘든 일임을 안다. 왜 출근해야 하는가, 돈을 벌기 위해서. 왜 돈을 벌어야 하는가. 먹고살기 위해서. 왜 먹고살아야 하는가. …. 몰라, 그냥 출근하자. 그런데 왜 출근해야 하는가…. 몰라. 그리고 몇 번의 반복.


과학자의 발견에 의하면, 멍게는 유생(변태 하는 동물의 어린 상태)일 때는 뇌를 달고 있다. 이동에 필요하기 때문이란다. 반면 성체가 된 멍게는 스스로의 뇌를 먹는다. 돌 따위에 달라붙어 더는 이동하지 않기에 많은 에너지를 요하는 뇌를 없애는 것이다. 나는 회사에 달라붙었기에 뇌를 먹은 걸까. 큰일이다. 나의 돌은 단단하지 않은데. 나는 계약직인데.


생각은 여가(scholē)를 필요로 한다고 학자(scholar)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그는 학교(school)에서 연구 년이라도 보냈던 걸까. 그토록 많은 생각을 하다니. 어쨌건 나에게는 연구 년이 없고, 그리하여 여가가 없고, 당연한 귀결로 생각이 없다. 일상을 정지시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대단한 거고, 여가가 없을 때 생각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거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여가를 누리는 자만이 철학을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강재가 생각하지 않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탓할 게 아니다.



2.



지금은 2022년이다. 나는 스무 살 때의 내가 예상한 거의 모든 것, 즉 경제적인 안정, 사회적인 인정, 꿈에 헌신하는 멋진 내 모습 등을 이루지 못했다. 며칠 전, 다시 말해 2021년의 끝 무렵, 늦게까지 일을 하고 집에 들어왔다. 겨울이라 쌀쌀한 건 당연했는데 그날따라 쓸쓸하기까지 했다. 그럴 때는 자기 연민이란 이불을 덮게 된다. 불쌍한 내게 치킨이라도 줘야지, 하는 좋은 핑계로 통닭을 사 왔고, 닭과 함께 영화를 봤다.


영화 시작 7분 만에 나는 노랑통닭 앞에서 울부짖었다. 이러면 염지를 거의 하지 않은 ‘착한 치킨’을 산 게 부질없었다. <파이란>이 재생될수록 치킨은 짜졌다. 이제는 내동댕이쳐질 때, 자빠질 때, 나뒹굴 때의 설움을 알기 때문이다. 강재는 빵에서 나오자마자 오락실에 갔고, 나는 퇴근하자마자 치킨 집에 갔다. 용식은 강재를 잡아 팼고, 초자아는 나를 자기 비하의 형식으로 두들겨 팼다. 스무 살 때는 왕자님이 아니라는 사실에 슬펐는데, 이제는 평민이기에도 힘들어 슬프다. 슬픈 와중에도 닭튀김을 알싸한 마늘 소스에 찍는 내 모습에 더 슬퍼졌다.


성공한 사람은 겸손함에 있어서도 성공하려고, 성공은 운입니다, 같은 말을 하곤 한다. 나는 그런 말에 위안을 느끼다가도 이내 정신을 다잡는다. 그들을 좇아 성공을 운이라고 말한다면, 내 주변 사람은 위로하는 척하다 이내 자리를 뜨고, 뒤돌아서자마자 나를 욕할 것이다. 아니면 면전에서 네가 언제 노력이나 해봤냐고 훈계할 것이다. 질타가 싫은 나는 성공이 운이 아니라 노력에 달려 있다고 여긴다. 내가 성공하지 못한 것은 내가 노력하지 않은 탓이다. 누굴 탓하리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작은 탓이로소이다.


아마도 강재 역시 자신을 원망할 것이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 살아가는 것도 잘하지 못해서. 이 모든 게 자기 때문이라 생각하면서.


3.



인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자면, 강재는 인천의 구도심을 닮았다.


좋게 말하자면 그는 경계인이다. 다시 말해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강재는 뒷골목이 요구하는 잔혹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고 앞 골목(?) 소속도 아니다. 평범함의 연료인 건실함을 잃은 지 오래된 탓이다. 인천의 옛 번화가는 도시라기엔 낙후되었다. 시골이라 하기에도 멋쩍다. 소박함을 상실한 지 오래기에.


<고양이를 부탁해>의 혜주(이요원)처럼, 강재에게도 인천 구도심은 발판이다. 머물러야 하는 곳이라기보다는 거쳐야만 하는 곳이다. 정착지라기보다는 정착지를 향한 통로이다. 혜주는 인천을 딛고, 서울에 사는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되려 한다. 강재는 배 한 척 살 돈을 마련해서 인천을 뜨려 한다.


그러나 어디 삶이 마음대로 되던가. 영화는 강재가 동인천에 얼마만큼 머물렀는지를 알려주지 않지만 관객은 안다. 그가 결코 짧은 시간 있었던 게 아니란 걸. 그의 구름판은 진즉에 허물어졌단 걸. 강재는 고장 난 발판에 끼인 채 자포자기하고 있단 걸. 이곳에서 그는 도약은커녕 유지에도 실패했단 걸.


늪에 빠지는 것처럼 가라앉는다. 얼마나 내려앉았을까. 강재는 자신이 “형님”이라 부르는 동기에게 두들겨 맞는다. 새까만 후배에게는 무시당한다. 그런 후배의 뒤통수에 연탄을 갈겨도 보지만 강재가 손에 들은 건 새까만 연탄이 아니라, 이미 다 타버린 하얀 재다.


연탄재는  번이라도 뜨거워서 하얘졌을 텐데 강재는 무얼 하다 재가 되었나.  시인은 무언가에 전심을 다한 연탄재를 발로 차지 말라고 했는데, 후배와 동기와 세상은  강재를 발로 차는가. 인천은 분명 번화한 도시였다는데 강재 인생의 번창기는 언제였을까. <파이란>보다   전에 개봉한 영화 <화양연화> 이후로 사람들은 묻는다. 당신 인생의 화양연화는 언제냐고. 그때마다 나는 궁금하다.  질문에 분명한 시기를 답하는 이가 있을까.


최소한 나는 아니다. 아마 강재도 말 못 할 것이다. 그렇게 언제 가장 행복했는지도 모르는 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채 나이 먹는다.



4.



우리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난

어두운 숲에 처했었네.


아, 이 거친 숲이 얼마나 가혹하며 완강했는지

얼마나 말하기 힘든 일인가!

생각만 해도 두려움이 새로 솟는다.


단테 알리기에리, 박상진 역, 《신곡 지옥편》, 민음사, 2013, p. 7.


지성계의 거인이라던 단테도 중년 무렵에 겪었던 혼란을 고백한다. 이제 올바른 길이 뭔지 모르겠고, 혼란이 찾아온 후에야 잘못된 길에 들어섰음을 깨달았다. 이를 보면 강재의 처지는 강재만의 것은 아닌가 보다.


<파이란>은 통속적이다. 세상에 널리 통하는 일반적인 풍속을 따른다는 거다. 적지 않은 사람이 생활에 휩쓸려 어딘가로 흘러가고, 그 와중에 굳건히 버티지 못한 자신을 탓하고, 이내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에 처한다. 잘 풀리면 용식이고, 안 되면 강재가 되는 걸까. 세상사 운이라 말하기엔 내 처지가 처량해서, 행운 말고 기댈 무언가가 필요하다.


영화처럼, 강재의 삶도, 나의 삶도, 그리고 아마도 많은 이의 삶도 통속적이니, 답도 통속에서 찾을  있을까. 가장 통속적인 . 흔한 . 사랑. 모든 문학과 예술에서 가장 많이 다뤄졌을 바로  사랑. 사랑이 혼란에 빠진 이를 구원할  있을까. 단테의 베아트리체, 강재의 파이란은 어디 있을까. 그리고 베아트리체와 파이란은 누가 구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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