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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Jan 10. 2022

멸공과 헤겔의 저쩔티비

<킹스맨 : 퍼스트 에이전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헤겔의 저쩔티비



다윈이란 이름조차 알지 못했을 고등학교 시절에도, 나는 성 선택 이론에 따라 팔을 벌린 채 뒤뚱뒤뚱 걸었다. 몸을 크게 보이려고 속셈이었다. 복어처럼 숨을 머금은 채 몸을 부풀렸다. 간절히 기도했다. 나는 비좁은 버스에서도 아랑곳 않고 넓은 공간을 차지해, 그런데도 나는 살아남았지, 난 이런 핸디캡에도 생존할 수 있는 강한 존재야, 그러니 나를 택해줘, 11번 버스에 있는 그대여, 인천여고, 신명여고, 인명여고 여러분, 제발요.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한껏 몸을 부풀려도 죽지 않았던 건 키가 크지 않고 체구 역시 작았기 때문이지 주변의 수컷을 제압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리고 다들 눈치챘겠지만 그 어떤 여성도 나를 택하진 않았다.


최근 만나는 중학생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종종 놀라곤 한다. 그들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이름조차 모를 텐데, 지양(aufheben)이란 개념을 적극 활용하기 때문이다. 헤겔은 우주 만물을 설명하려 했던 (아마도) 마지막 철학자이자 그 자신의 말을 온전히 이해한 (아마도) 마지막 사람일 거다.


철학과에선 독일 유학파 출신 교수의 신선한 농담을 접하게 된다. 철학에서 100년은 현재와 비슷한 것이니 20-30년 된 농담을 구사하는 자는 자신을 힙스터라 여기게 된다. 물론 세상의 평가와 철학과의 평가는 같지 않아서, 철학 힙스터는 일상에선 아재로 판명된다. 독일파 선생은 전에 본 적 없는 미소를 머금으며 말한다. “여러분. 독일 사람들은 헤겔이나 하이데거의 책을 읽으며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헤겔과 하이데거 책은 언제 독일어로 번역되냐고.”


선생은 젊었을 적을 회상하며 껄껄껄, 나를 포함한 학생들은 권력 앞이라 배시시. 설명이 필요한 드립은 실패한 드립이다. 위 농담은 실패한 농담이니 뜻풀이를 적겠다. 독일파 교수의 진의는 헤겔이나 하이데거의 텍스트가 같은 언어권 사람에게도 어렵다는 거다.


내가 이해한 대로 써보자면, 헤겔의 지양은 보존하다, 폐지하다, 들어올리다란 뜻을 지닌다. yuji하면 yuji하는 거지, 없애면 없애는 거지, 없애면서 yuji하는 건 무엇인가. 그러면서 고양시키기까지 하다니 부지런도 하다. 개념 정의보다는 예시를 통해서 파악하는 게 쉬울 때가 있다. 그리고 중학생 친구들의 대화에서 지양의 예를 발견할 수 있다. 10-20대 언어의 네이티브 스피커라면 원문 그대로를 읽으면 되고, 그게 아니라면 괄호 속의 해석본을 읽으면 된다.


학생 1 : 어쩔티비? (어찌 그리 말할 수 있소?)

학생 2 : 저쩔티비? (그대의 반응보단 진실이 중요하다네.)

학생 1 : 안물티비. (난 당신의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오.)


저쩔티비는 어쩔티비를 부정한다. 즉, 폐지한다. 동시에 저쩔티비는 어쩔티비가 나온 이후에만 가능한 말이다. 즉, 어쩔티비를 보존해야만 저쩔티비가 나올 수 있다. (어쩔티비란 초식이 나오지 않았는데 저쩔티비란 반격기를 쓰는 자는 중등 세계에서 퇴출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어쩔티비와 저쩔티비는 하나의 쌍을 이루어, 안물티비를 낳고, 안물티비에 이르게 되면 이들의 싸움은 말에서 그치지 않게 된다. 말다툼이 육탄전으로 높여지는 것이다. 즉, 저쩔티비는 어쩔티비를 보존하고 동시에 폐지하며 궁극으론 고양시킨다.


(유능한 교사인 나는 위의 대화를 나눈 두 중학생이 싸우기 전에 대화의 지평을 이동시켰다. 그리고 그들 내면의 이유 없는 분노를 내게 향하게끔 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짱 재밌겠다”라 말함으로써. 두 학생은 선생의 촌스러움을 힐난하며 어느새 갈등을 잊었다.)



킹스맨은 어떻게 킹스맨이 되었나



1902년, 영국군은 아프리카인이 된 네덜란드인, 즉 보어인을 박살 내려한다. 전쟁이 새로울 게 없듯 이유도 새로울 게 없다. 다이아몬드와 금 때문이다. 이러한 정보는 상식이라는 걸까. 아니면 ‘대영제국’의 흑역사는 감추려는 걸까. 영국인 감독은 전쟁에 대해선 침묵하고 다음의 장면을 시작으로 삼는다.


영국인 옥스퍼드 공(랄프 파인즈)이 보어인 포로수용소에 구호 물품을 전달하러 방문한다. 아내, 아들, 집사와 함께. 그는 작은 거인, 결혼한 총각, 살아있는 시체와 같은 존재다. 즉, 착한 제국주의자이다. 하필이면 그때 보어인 습격대가 수용소를 공격한다. 그는 다리에 총상을 입고 아내는 죽는다. 아들이 전쟁과 같은 위험한 상황에 휩쓸리지 않게 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며 그녀는 숨을 거둔다.


아내에 의해 옥스퍼드 공은 지양된다. 그의 본질은 ‘전쟁을 외면한 평화’이다. 하지만 아내는 그를 부정한다. 아들을 위해서라도 전쟁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아내 에밀리는 남편의 절반, 즉 ‘전쟁을 외면한’을 폐지하면서 동시에 ‘평화’라는 절반을 보존한다. 동시에 그는 고양된다. 관객은 상영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알게 되겠지만, 고양된 옥스퍼드 공은 평화를 적극적으로 수호하기 위해서 비밀 조직을 만든다.


위에서 언급한 독일 출신 교수가 농담 뒤에,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한 이야기이다. 헤겔의 철학은 어지럽지요. 왜일까요. 지양에는 끝이 없으니까요. 다시 말해 지양, 즉 보존-폐지-고양의 흐름은 계속된다. 생각해보면 이건 헤겔의 특징이 아니라 우리 삶의 특징이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계속된다. 지금이 끝장인 줄 알았지만 또 다른 끝장이 있고, 여기가 바닥이라 생각했지만 지하실이 있는 식이다. 이러한 인생을 사는 모든 이들께 독일 맥주라도 대접하고 싶은 심정이다. 나 역시 독일 맥주를 대접받고 싶다.


옥스퍼드 공의 비밀 조직은 또 다른 지양을 맞이한다. 그의 아들 콘래드(해리스 딕킨스)가 기어이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거다. 아버지는 아들의 의지를 부정하지만, 아들은 다른 모든 아들처럼 자신의 의지를 보존한다. 콘래드는 한사코 참전한다. 그리고 죽는다. 한 순간 영웅이 되었고 한 순간에 사살된다.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 즉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에게 킹스맨인 그 영화에서 갤러헤드(콜린 퍼스)가 화끈하게(?), 질질 끌지 않고 죽는 것처럼, 콘래드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죽는다.


옥스퍼드 공은 실의에 빠진다. 그는 대선 캠프를 내팽개친 윤석열처럼, 비밀 조직을 내팽개친 채 술독에 빠진다. 이때 김종인이 윤석열을 찾듯, 왕 조지 5세가 옥스퍼드 공을 찾는다. 아들 몫의 훈장을 든 채. 왕은 아들이 되고자 했던 모습을 기억하라 말한다. 명목상으론 옥스퍼드 공의 메이드이고, 실질로는 그의 동료인 폴리(젬마 아터튼) 역시 같은 말을 건넨다.


이때 옥스퍼드 공은 다시 지양된다. 현재, 옥스퍼드 공의 본질은 ‘영국을 위한 평화’이다. 반면 아들 콘래드는 ‘영국군’으로 죽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영국을 위한’을 지우고, ‘평화’를 보존시킨다. 이제 옥스퍼드 공의 목표는 어느 한 단체에 국한되지 않는 ‘평화’이다. 그 어떤 관료, 정치, 국가에도 얽매이지 않은 비밀 조직, 킹스맨은 이렇게 탄생한다. 숱한 부정과 마주함으로써, 동시에 그 부정에 무릎 꿇지 않고 고양됨으로써.



멸공을 지양합시다



해묵었다 생각한 “멸공 화제다. 정용진 부회장이 자신의 SNS 지속적으로 해당 표현을 올리고 있고, 유력 정치인인 윤석열과 나경원과 최재형이 여기에 화답하듯 멸치와 (멸콩 → 멸공) 사진을 노출시킨 탓이다. 윤석열은 평소 멸치 육수를 즐긴다는 해명을 내놓았지만 그가 손에  멸치는 조림용이었다.  자신은 몰랐을지라도, 그에게 멸치를 건넨 보좌진은 분명 멸치-콩의 조합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김일성과 김정일과 레닌과 스탈린의 시체가 보존되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살아 있는  아니다. 보존은 삶의 일부이다. 삶은 긍정되고, 부정되고, 고양되고, 그러면서도 긍정하고, 부정하고, 고양하는 과정  자체이지, 어느 하나만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다. 레닌의 시신이 영원히 썩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영원한 삶을 누리는  아니다. 보존으로만 구성된 삶은 성립하지 않으니까.


헤겔의 제자라 할 수 있는 카를 마르크스는 19세기에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말을 남긴 바 있는데, 공산주의는 진짜 유령인가 보다. 사라졌는데도 그게 보인다는 이들이 나타나니 말이다. 심지어 공산주의를 쫓아내겠다는 퇴마사까지 등장하니 말이다. 당신이 신 내림을 받은 게 아니라면, 아무리 진지하게 유령을 봤다고 해도 주변의 평가는 좋지 않을 거다.


고인을 잘 보내는 방법은 여기, 지금의 삶을 잘 사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안타까움을 자아내지만, 죽은 사람이 살아있고 그래서 그놈을 멸하겠다고 하는 것은 꼴불견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나 <킹스맨 : 골든 서클>이 아니라, <킹스맨 : 퍼스트 에이전트>만을 보존한 채 평생 동안 이 영화만 보게 하는 형벌에 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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