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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Jan 16. 2022

이해 못하는 이들의 싸움을 이해 못하는 이가 본다는 것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데모크라시 얼굴



10년 전쯤, 1950년대 생으로 추정되는 노교수와 이야기한 적이 있다. 원해서 한 건 아니었고 학술대회 뒤풀이 자리에서 화장실에 다녀오니, 본래 내 자리를 누군가가 차지했고 노교수 옆 자리만 비어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노교수는 근래의 고민이 무어냐 물었고 나는 일베의 창궐이라 답했다.


그때는 내가 뭐라도 된 줄 알았지. 그때는 내가 뭐라도 될 줄 알았지. 당시엔 텅 빈 지갑이나 삐꺽 대는 무릎이나 보이지 않는 미래 같은 게 고민이 아니었다. 세계가 걱정됐을 뿐. 진심으로 나의 근심은 일베 문화의 부상이었다. ‘민주화’를 조롱하는 세태에 분통을 터트렸던 것도 같다. 그러자 노교수가 60-70년대의 은어를 알려줬다. 당신 때는 못 생긴 얼굴을 일컬어 데모크라시라 표현했단 거다.


안나 카레니나 법칙은 어지간한 곳에는 다 적용이 되는지, 잘 생긴 얼굴은 엇비슷하지만 못생긴 얼굴은 제각기 다르다는 말을 할 수도 있다. 제각기 다르다는 것, 각각의 개성이 살아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민주주의이니, 왜 데모크라시 얼굴이란 표현이 나왔는지 이해가 되기도 한다. 또 권위주의 시대엔 지금보다 민주주의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했을 테고.


시간은 흘렀고 어느새 나는 일베의 부상보다는 나의 몰락을 걱정한다. 그럼에도 가끔씩 위의 일화가 생각이 난다. 60-70년대의 흐름을 몰랐던 나는, 처음 겪는 민주화에 대한 희화화를 우려했다. 인터넷이란 흐름에 속하지 않았던 노교수는 냉소와 조롱의 범람을 알지 못했다. 이렇듯 어떤 맥락에 있느냐에 따라서 앎도 달라진다. <송곳>에 나온 그 유명한 말처럼, 서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진다.


하나면 알박기, 여러 개면 주택 단지



텍스트는 본래 씨실(가로실)과 날실(세로실)로 직조된 면을 일컫는다. 명징하게 직조되면 좋은 텍스트고 아니면 나쁜 텍스트다. 사실 텍스트는 본래의 뜻보다는 언어로 이루어진 복합체를 의미하는 경우가 더 많다. 문서, 책, 이론 체계 등을 가리키는 것이다.


텍스트를 집에 비유해보자.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집은 오해를 받곤 한다. 이 거대한 아파트 단지에 외로이 서있는 저 낡은 집은 무엇인가. 옛 땅 주인이 알박기를 시도한 것인가. 역사적인 인물의 생가인가. 혹은 퓨전을 좋아하는 건설사의 취향이 반영된 위락 시설인가. 하나만 있는 텍스트는 파악되기 어렵다. 반면 여러 개의 낡은 집을 판단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한국에서 그곳은 재개발 후보지로 판명된다. 집은 집 자체로 평가되지 않고 어디에 속했는가에 의해 판단된다.


다시 말해 텍스트(text)는 텍스트들이 함께(con) 있는 곳에서 진가를 드러낸다. 그리고 텍스트가 함께 있는 곳이 콘텍스트(context)이다. 한 채의 집이 어떤 단지에 속했는지에 의해 가늠되듯, 텍스트는 그것이 만들어진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평가될 때 제대로 된 의미를 드러낸다. 콘텍스트에 의해 의미도 달라지기에, 누군가가 뜻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그가 어떤 맥락에 속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콘텍스트, 해석의 공동체



콘텍스트를 공유한다는 건 동일한 해석 체계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고개를 숙이는 건 상대에게 존중을 표하는 행동으로 해석된다. 폴더 인사를 체화한 아이돌 스타가 타임머신을 타고 천 년 전의 일본에 갔다 해보자. 그는 낯선 환경에 당황하지만,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해서, 다가오는 사무라이에게 목을 드러내며 90도 인사를 할 것이다. 사무라이는 희한한 녀석에게 몇 마디 희롱을 던져보지만, 아이돌은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만 반복하며 춤을 출 뿐이다. 잠시 후 아이돌은 다시금 폴더 인사를 한다. 아이돌이 드러낸 목을 근거로, 사무라이는 상대가 자기보다 낮은 계급임을 확신하고, 아이돌의 목을 베어버린다.


같은 행위도 어느 맥락에서 행해졌는지에 따라 다르게 평가된다. 어디선 인사가 되고 어디에선 계급의 고백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말과 행동을 잘 이해하려면, 그것이 속한 콘텍스트 내에서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콘텍스트를 벗어나 상대의 콘텍스트로 들어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상당한 견문과 용기와 노력과 개방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익숙한 방식으로, 편한 방식으로 산다. 그리고 자신의 콘텍스트는 자기의 생활 방식이고, 우리는 너무도 익숙한 나머지 자기 삶의 패턴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에도 애를 먹는다. 서구권 국가에 처음 여행 갔을 때에야 나는, 내가 친하지 않은 상대에게 나이를 묻는 버릇이 있음을 깨달았다. 한국에서는 으레 그런 줄 알고 지냈겠지만 한국 밖에서 나이를 묻는 것은 실례였다. 한국이라면 나이에 대한 질문이 상대를 불쾌하게 할 수 있음을 아마 몰랐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자기 자신이 속한 콘텍스트를 파악하는 데에도 안간힘을 써야 하고, 자기 콘텍스트에서 벗어나 상대의 콘텍스트에 들어가는 데에도 기를 써야 한다. 상대를 이해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오해는 21세기 아이돌과 11세기 사무라이 간에만 빚어지는 게 아니다. 최근에는 아파트 단지 간의 오해, 지역 간의 오해, 인종 간의 오해, 국가 간의 오해가 더 늘어난 것만 같다. 오해가 싫어서인지 이제 사람들은 콘텍스트 간의 장벽을 드높인다. 자기에게 익숙한 맥락에만 머무른다. 혹자는 계급과 지역 사이에 성벽이 쌓이는 것을 두고 ‘신중세’라고도 하던데, 중세에는 모두를 아우르는 신이 있었지만, 현대인에게는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벽은 높아지는데 성 모두를 포괄하는 이도 없는 것이다. 


이해 못 하는 이들의 싸움을 이해할 수 없는 이가 본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자신의 영화 역사를 회고하면서 뮤지컬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서부극도 안 해봤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예술? 까짓것 안 해 본 거 해보면 되는 거 아냐, 라는 듯이 거장은 뮤지컬을 만들었다. 바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다.


무척 낯선 작품이다. 감독이 경상도 사람이었다면 “마! 니 50년대 에레이 할리우드 가봤나”라 말했을 것이다. 실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할리우드 고전 뮤지컬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영화의 콘텍스트는 대부분의 관객에게 낯선 것이다. 작품 안에도 익숙하지 않은 콘텍스트들이 등장한다. 백인 하층민 갱단 제트파와 푸에르토리코 출신 이민자로 이루어진 조직 샤크파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세 개의 낯선 콘텍스트, 즉 고전의 맥락과 백인 하층민의 맥락과 이주민의 맥락 모두와 연관된다.


카메라가 눈을 뜨고 처음 보는 곳은 폐허다. 영화의 배경은 뉴욕 슬럼가인데, 이곳에는 곧 고급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다. 시 당국은 하층민의 주택 단지를 허물고 있고, 거주민을 곧 내쫓을 예정이다. 자신들의 공동체가 박살 나고 있는데도 백인 갱단은 푸에르토리코 이주민 지역을 공격한다. 아니, 자기 집이 파괴되게 생겼으니까 더 약한 상대를 공격하는 걸까. 화풀이를 하다 보면 어려운 문제를 잊을 수 있으니까. 푸에르토리코인 역시 물러설 수 없다. 내몰리고, 내몰리다 간신히 정착한 곳인데, 공권력과 지역 깡패 모두는 자신들을 이방인으로 규정하고 공격하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서라도 지역을 방어해야만 한다.


화려한 군무와 백인의 공격이 얽히는 가운데 푸에르토리코인들의 비명과 절규가 들린다. 그런데 자막이 없다. 스페인어 자막은 의도적으로 생략되었다는 자막 이후로, 스페인어에는 어떠한 설명도 붙지 않는다. <미나리>를 외국어 영화로 분류했던 골든글로브의 기준에 따른다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외국어 영화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스페인어가 나온다. 자막 없이 말이다.


작품의 세 콘텍스트는 배타적으로 작동한다. 백인 콘텍스트에 속한 이는 푸에르토리코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푸에르토리코 공동체에 속한 이들은 백인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 둘에 포함되지 않은 관객은 이들 모두를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영화는 대부분의 현대 관객에게는 멀게 느껴질 고전 뮤지컬 형식을 차용하고 있고, 스페인어에는 자막조차 달리지 않는다. 서로를 이해 못 하는 이들의 싸움을, 이해할 수 없는 관객이 바라본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감금되지 않는다



자기 맥락 안에 감금된 사람만을 비춘 필름은 예술이 되지는 못한다. 왜? 그건 일상이니까. 일상에 있는 특별함을 담아내야만 예술이 되니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예술이고 당연히 특별한 이가 등장한다. 바로 토니(안셀 엘고트)와 마리아(레이첼 지글러) 커플 그리고 발렌타인(리타 모레노)이다.


토니는 하층민 로미오이고, 마리아는 이주민 줄리엣이다. 토니는 한때 백인 갱단 두목이었지만 출소 이후엔 건실한 삶을 살려한다. 마리아는 푸에르토리코 깡패 집단의 우두머리인 베르나르도의 여동생이다. 지역 통합 위원회(?) 같은 곳에서 주최한 댄스 대회에서 토니와 마리아는 우연히 만난다. 단박에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고전일까 아니면 인간 삶의 한 모습일까. 어쨌든 둘은 사랑에 빠진다. 발렌타인은 푸에르토리코 출신 이주민이지만 백인 남성과 긴 시간 함께 살았다. 그래서 그녀는 푸에르토리코인의 맥락을 이해함과 동시에 백인 하층민의 콘텍스트도 이해한다.


<기생충>에 나오는 ‘냄새’처럼 ‘사랑’도 모든 구분을 가로지른다. 아토피(atopy)처럼 사랑도 장소(topos)를 부정(a-)한다. 아토피는 특정한 부위에 국한되지 않고 여기저기를 간지럽힌다. 사랑 역시 익숙한 콘텍스트에 머물지 못하게끔 나를 간지럽힌다. 그리하여 익숙한 맥락에서 벗어난 나는, 낯선 곳에서 상대를 마주하고, 이내 헤아릴 수 없는 상대에게 빠진다. 어떠한 콘텍스트도 가지지 않는 신생아가, 갓 태어난 동물의 새끼가, 처음 보는 대상, 즉 엄마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말이다. 사랑하는 이가 변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는 자신의 콘텍스트에서 벗어나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딛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토니와 마리아라는 텍스트 각각은 이전의 해석 체계로는 풀리지 않는 무언가가 된다. 


사랑은 장소가 없는 것, 즉 아토포스(atopos)이다. 사랑의 대상은 단지에 속하지 않은 집이요, 특정한 콘텍스트에 속하지 않은 텍스트다. 그래서 사랑의 대상은 분류되지 않고, 파악되지 않는다. 사랑하게 된 사람은, 사랑하는 이 앞에서 이상한 행동을 일삼는다. “배가 너무 고파서 네가 보고 싶어 졌어”하는 되지도 않은 소리, “오다가 습득하였는데 이 꽃 너 가지지 않으련”하는 허튼소리가 나오는 건, 익숙한 콘텍스트에서 벗어난 이가 일으키는 오작동이다. 그는 고장 난 기계처럼 뻣뻣하고, 처음 숨을 쉬는 것처럼 헐떡이며, 모국어를 배우지 못한 아기처럼 웅얼댄다. 사랑에 빠지면 그렇게 된다.


2012년에는 솔로대첩이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3000여 명의 솔로 남녀가 한 데 모여 대규모로 미팅을 벌인 이벤트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러한 계획을 염두에 둔 행사였다. 솔로대첩은 참가 여성보다 비둘기가 많았다는 전설만을 남긴 채 막을 내렸다. 콘텍스트 간에 성벽이 드높아지는 요즘, 분리와 분열과 갈등이 심해지는 요즘, 제2의 솔로대첩이라도 열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토니와 마리아도 공무원이 주최하는 무도회에서 서로를 만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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