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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Jan 26. 2022

쟤는 근의 공식 안 쓰고 문제 푼대

<아이 웨이웨이: 인간미래>

무너트리기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연구에 심취한 아이 웨이웨이를 만날 수 있다. 어떻게 평면 위에 멀고 가까움을 새겨 넣을 수 있을까. 소실점을 이리 맞춰보고 저리도 맞춰본다. 작품은 <원근법 연구>이고 도구는 간소하다. 바로 중지, 즉 세 번째 손가락이다.


달을 보지 않고 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냐는 타박은 많은 경우 옳지 않다. 누군가 달을 식칼로 지목한다면 우리는 달을 보지 않고 섬뜩함을 느낄 뿐이다. 그래서 아이 웨이웨이의 연구는 원근법에 대한 것으로 보이지 않고, 대상에 대한 조롱으로 보인다. 그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은 주로 권력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천안문, 백악관, 루브르 같은 것들이다.


흠, 아이 웨이웨이는 중국 서태지인 걸까. 네가 뭘 아냐는 노친네들을 상대로 “난 알아요!”를 외쳤던 서태지와 결을 같이 하는 걸까. 아니면 그는 퉁퉁이 지디인 걸까. 정해진 대로 살라는 (한때 X 세대였던, 언젠가 반항아였던) 꼰대들에게 오늘만은 삐딱하게 있겠다고 노래하는 걸까. 숱한 <원근법 연구>에서 아이는 기성 질서를 부정한다. 당대의 지배적인 관념, 즉 고정관념을 무너트리려 한다.


아이 웨이웨이, <원근법 연구: 천안문 광장>, 2014, 흑백 프린트, 아이 웨이웨이 스튜디오.


무너진 것들



지하 전시장 구석에선 영상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오래 머무르며 감상하란 듯이 의자가 있다. 의자 협찬 업체 측에선 작품의 신선함을 강조하고 싶었나 보다. 의자 보관함에 닳고 닳은 문구가 적혀 있어, 상대적으로 예술가의 작업이 더 산뜻하게 보인다. “예술이 삶을 바꿉니다.” 진짜? 비뚤어진 나는, 바꾸긴 바꾸겠지 부정적으로,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며 영상 전시장에 진입했다. 이제 예술가가 찍은 화면이 보인다.


여태 기성 질서에 반항하고 새로움을 갈망했으니 여기에서도 그러하겠지, 하는 기대가 있었다. 중년 락스타 또는 아저씨 래퍼가 세상을 더 우롱하고, 때려 부수길 바랐다. 허나 나의 일그러진 기대를 배반한 채 영상 자료는 낡은 것에 대한 사랑, 사라진 것을 향한 향수를 내비쳤다.


의자에 앉아 한 시간 가량 <2003년 베이징> 영상을 봤다. 듣자 하니 신세대들은 브이로그라는 것을 본다던데, 오호라, 나 왜 여태 이걸 몰랐던가. 흡사 여행을 다니는 듯 즐겁구나.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살어리 살어리랏다 베이징에 살어리랏다. 양꼬치랑 훠궈랑 먹고 베이징에 살어리랏다. 작품에서 아이 또는 그의 조수는 차에 탄 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베이징 뒷골목의 모습을 담는다. 150시간 동안.


영상을 보는 중에도 많은 관람객이 지나갔다. “나 5년 전에 베이징에 다녀왔잖아. 아, 또 가고 싶다.” “저긴 종로 같다.” “오늘 뭐 먹을까?” 역시 사는 건 비슷하군, 하는 찰나에 새로운 정보가 들린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위해, 베이징의 낡은 건물을 다 정리했대. 아이 웨이웨이는 아마 사라지기 전의 베이징을 담으려 했나 봐.”


아이 웨이웨이, <2003년 베이징>, 2003,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50시간, 아이 웨이웨이 스튜디오.


듣고 보니, 다른 영상물에서도 아이 웨이웨이는 저항의 태도가 아니라 연대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 로힝야족의 아픔을 촬영한 것도 있고, 공권력에 의해 희생된 멕시코인의 이야기를 담은 것도 있다. 올림픽이란 거대 이벤트 때문에 사라진 베이징의 뒷골목 역시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작가는 권력에 의해 사라진 것, 힘에 의해 무너진 것을 옹호한다.


작가는 무얼 말하려는 걸까. 고정관념의 타파? 기어이 기원전에 제작된 도자기를 찾아내서 깨뜨리는 것, 한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화병에 팝아트에서나 볼 수 있는 원색을 입힌 것을 보면, 그의 주된 행동은 저항인 듯하다. 그뿐인가. 똘기, 떵이, 호치, 새촘이, 자축인묘, 아, 그게 아니라, 한나라 때 동물로 형상화된 십이지신의 모습을 레고로 조립해서 표현한 것도 있다. 그에게 전통, 관습, 유산 따위는 놀잇감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작품에서 드러나는 것은 아이 웨이웨이의 무너트리려는 의지이다.


동시에 예술가는 무너져가는 것을 의식한다. 우선, 2000년 전 황제의 무덤에서 발견된 갑옷 형상을, 대나무로 연을 만드는 전통 방식으로 구현한, 12m에 달하는 대형 작품 <옥의>가 있다. 그리고 제각각의 이유로 본래 살던 곳에서 내쫓긴 자들의 자취를 좇는 수많은 영상이 있다. 아이는 잊힌 것을 그리워한다. 여기서 드러나는 그의 마음은 반항보다는 공감에 가깝다.


그의 관심은 없애는 데 있는가, 없어진 것에 있는가. 작가의 정신은 파괴에 있는가, 파괴된 것에 있는가. 예술가의 활동은 타파인가, 보존인가. 그의 마음은 무너트림에 있는가, 무너진 것에 있는가.


난민



전시장엔 무너트림과 무너진 것뿐만 아니라 난민도 있다. 권력이 무너트렸고 그리하여 무너진 이들, 딛고 설 땅이 없어 망망대해를 유랑하는 이들이다. 삶의 터전이 허물어지고,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사라지고, 결국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여기저기를 헤매는 이들이다.


난민의 자리, 즉 무너진 곳, 폐허가 된 곳, 텅 빈 곳에 매료된 듯 아이 웨이웨이는 그곳의 흔적을 남김없이 수집한다. <구명조끼 뱀>은 그리스 북동부에 있는 레스보스 섬에 난민들이 벗어둔 구명조끼 140벌로 제작됐다. 성경에서부터 나의 어머니 임 여사에게 이르기까지, 뱀에 대한 혐오는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인데, 우리는 난민의 자국까지도 혐오의 시선으로 본다는 뜻일까.


<빨래방>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국경에 머문 난민들이 남긴 옷을 세탁하고, 수선하고, 다림질해서 옷걸이에 건 것이다. 백화점의 의류 코너처럼 <빨래방>에는 유아복부터 노인을 위한 것까지 다양한 옷이 걸려 있다. 성인 손바닥 크기의 신발부터 커다란 부츠까지 신발 종류도 여러 가지다. 난민 역시 정착민처럼,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각양각색의 인간들로 구성된 연합이라는 걸까. 그렇다면 아이 웨이웨이는 당연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클리셰는 강조되어야만 한다. 사람을 죽이면 처벌받는다는 문구는 전시될 필요가 없는데 이는 거의 모두가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시장에서 큰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면 안 된다는 내용은 알려질 필요가 있는데, 미술관에서 시끄럽게 구는 사람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1월의 어느 날, 발렌시아가 로고가 백 개 이상 새겨진 카디건을 입은 사람이 있었다. 자신이 입은 브랜드를 만방에 알리겠다는 의지뿐만 아니라 자기의 목소리를 만천하에 퍼뜨리겠다는 의지까지 지닌 자였다. 그러면 안 된다.) 작가는 난민이 비(非)-난민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린다. 이 사실을 잊은 이가 많은 탓이다.


당연하지만 여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실을 알리는 건 중요하다. 난민 역시 비-난민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다시금 공지되어야 한다. 그런데 전시 타이틀이 ‘인간미래’인 까닭은 무엇일까. 모든 인간은 미래에 난민 처지가 된다는 걸까. 아마도, 그렇다.


아이 웨이웨이, <유랑하는 사람들>, 2017,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2시간 20분, 아이 웨이웨이 스튜디오.


난민 = 인간미래



빼어난 예술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머금고 있다. 소위 명작이라 불리는 것은 새로운 해설을 계속해서 짊어짐으로써 명작이 된다. 닫힌 작품으로 열린 해석에 대비해야 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내가 알지 못하는 가능성을 심어놓는다는 건 아마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그래서 좋은 예술 작품을 만드는 건 무척이나 어렵다. 여기에 운도 따라야 한다. 말해지지 않은 가능성을 현실에서 발음해줄 사람을 만나야 하니까.


중학생이라면 대체 한용운의 님은 몇 명이냐고, 중이 뭐 이리 많은 사람과 사귀었냐고 분통을 터뜨리겠지만, 사실 님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심심한 세상에 사랑할 존재가 많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님의 침묵>은 사랑에 대한 노래이기도 하고, 망국의 비탄이기도 하다. 그리움이나 좌절된 욕망의 비가(悲歌)이기도 하다. 아니면 마조히즘의 송가일지도. 읽는 이에 따라서 <님의 침묵>은 애국지사의 읊조림이 되고, 마조히스트의 신음이 된다. 좋은 예술은 다양한 빛을 예비하는 프리즘이고, 독자/청자/관객은 이러한 프리즘을 통해서 전에 없던 빛을 내뿜을 수 있다.


나는 아이 웨이웨이가 좋은 예술품을 만들었다 생각하기에 과감히 하나의 해석을 더해보려 한다. 그가 말하는 난민은 고향을 잃은 자, 그러니까 문자 그대로의 난민만을 일컫는 게 아니라 현대인의 은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고정관념



고정관념은 근의 공식과 같다. 세상을 살다 보면 다양한 문제에 직면한다. 일차방정식 같은 비교적 쉬운 문제도 있고 이차방정식도 있다. 이차방정식의 경우, 인수분해를 통해서 문제를 풀 수도 있지만 근의 공식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도 있다. 근의 공식은 그 자체로 유용한 도구이지만, 문제는 우리가 너무도 쉽게 타성에 젖는다는 거다. 99개의 이차방정식을 푼 이는 100번째 문제에도 근의 공식을 들이댄다. 100번째 문제 역시 이차방정식이라면 다행이지만 그것이 삼차방정식이라면 어찌할 건가. 근의 공식을 제아무리 대입해도 문제는 풀리지 않을 것이다.


고정관념도 마찬가지다. 고정관념은 많은 경우 인간사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효한 공식이다. 하지만 고정관념에만 젖어들면 새로운 문제를 풀 능력을 기르지 못한다. 또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푼다는 건,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산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생은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기도 하니까. 고정관념의 폐해는 새로운 시대를 대비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모두의 생활 형태를 하나로 고정시킨다는 것이다.


주로 이차방정식이 문제였던 시절이 지나고, 삼차, 사차, n 방정식이 쏟아지는 시대에도 근의 공식만을 고집한다면 그건  자체로 문제다. ‘액체 근대라는 말이 나온 것도 20년이 지났다.  후로도 헬조선, 피로사회, 4 산업 혁명, 메타버스 등의 개념이 쉬지 않고 나왔다. 우리 공동체에 대한 정의나 설명이 이토록 변화무쌍한 것은 그만큼 변화가 빠르다는 방증일 것이다. 여태까지의 고정관념은 쓸모를 다해가고 있다. 근의 공식은  이상 세계를 풀어내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이제 근의 공식이 한물갔단 걸 눈치 챈다. 그거로는 더 이상 세계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짐작한다. 이때부터 그는 세상과 불화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차방정식이 아닌 문제에도 근의 공식을 들이대고 있고, 자신은 어떤 공식으로 문제를 풀어야 할지 알지 못하니까. 익숙한 곳은 이제 익숙하지 않게 되었고, 나아갈 곳은 여전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많은 경우, 근의 공식이 삐걱댄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고정관념의 세계로 돌아가곤 한다. 아무것도 모르기보단 잘못된 것이라도 아는 게 속이 편하니까. 종종 이게 아닌데, 하는 마음이 들지만 그럴 때는 힐링하고, 소확행을 누리고, 플렉스를 하면 된다. 대다수는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그렇게 산다.


실존



근의 공식을 벗어나는 사람은 극히 소수다. 일상의 아늑함을 포기한 그는 이제 도구 없이 문제와 마주한다. 간단한 수식에도 그는 식은땀을 흘린다. 그에게는 지식이랄 게 없다. 순간순간의 위태로운 대처가 있을 뿐이다. 안 그래도 힘든데 주변의 야유까지 들린다. 모든 체제는 자신의 지속을 의욕한다. 반공주의자가 끝없이 멸공을 외치듯이 근의 공식 꼰대들도 공식을 벗어난 이를 멸하려 든다. 고정관념이 설명하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면, 사람들은 동요되고, 일탈의 유혹에 시달릴 거고, 그리되면 근의 공식 꼰대들의 지위도 무너질 테니 말이다. 편안함을 포기하기 싫은 마음과 꼰대들의 위협에 시달리며 결국 그는 고정관념으로 돌아가려 한다.


여기서 예술가가 개입한다. 기성 질서의 흔들림을 힐끗 본 이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근의 공식은 여태까지의 일상을 설명할 뿐, 다가올 실존을 설명하지 못하며, 도래할 세계에서 이는 우스꽝스러운 게 될 거라는 내용이다. 아이 웨이웨이는 고정관념을 마음껏 조롱한다. 천안문? 엿이나 먹으라 그래. 백악관? 마찬가지야. 수천 년 된 도자기에 위엄이 서려 있다고? 깨버리면 그만이야. 그는 고정관념을 마구 흔들어서, 여기에 손이나 발을 걸치고 있는 사람을 탈탈 털어낸다.


작가는 기존 도식에 대한 한 줌의 미련까지 버리라고 말한다. 자신은 단지 재미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는 듯 매우 성실하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원근법 연구>는 근 20년간의 산물이고, <2003년 베이징> 필름은 150시간에 달한다. 흔히 반항은 청소년기에 이루어지는 한정적인 활동으로 여겨지지만, 아이 웨이웨이는 거의 평생을 저항하고 있다. 이러한 충실성에 설득되는 자가 아주 가끔 등장한다. 이제 그는 고정관념의 바깥으로 발을 내딛는다.


그리스인 조르바, 변강쇠 이대근 또는 철학자 니체와 같이 엄청난 힘과 의지를 지닌 이라면, 고정관념을 벗어나 미지의 세계에 진입한 걸 기뻐할지도 모르겠다. 근의 공식이란 도구가 없으니 내 마음대로 문제를 풀 수 있다, 고정관념이란 집이 없으니 어딜 가도 내 집이다,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신이 없으니 내가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신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조르바나 이대근이나 니체일 순 없다. 근의 공식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분명 그것은 쓸모 있는 삶의 연장이었고, 기댈 구석을 제공함으로써 생활에 안정감을 주는 도식이었다. 하지만 바깥으로 나온 이에겐 이제 근의 공식이 없다. 더 이상 지식이라 부를 게 없는 처지, 의지할 곳이 없는 신세를 감당하고 환영하고, 기뻐할 만큼 강인한 자는 그리 많지 않다.


연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정관념 안에 거주하면 세계의 변화를 설명하지 못하고,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살게 된다. 고정관념 밖을 향하면 모든 위험에 홀로 맞서야 하고, 고정관념 안에 머무는 이들의 적의까지 감내해야 한다. 혼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다. 그러나 여럿이서 고정관념을 탈출한다면 어떨까. 홀로 난민이 되기보다는 다 같이 난민이 되는 것은 어떨까. 난민 간의 위로와 공감과 연대가 있다면 어떨까.


예술가의 작품은 다음을 말하고 있다. 모두가 고정관념을 벗어나서 난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 난민이 되어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발명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삶의 힘겨움에 허덕이는 이들끼리 서로를 보듬어야 한다는 것.


물론 이방인이 내뿜는 건 이국적인 매력뿐만 아니라 위험이기도 하다. 설명되지 않는 답답함을 안겨주기도 하고, 기성 질서의 위해가 되기도 하며,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러한 갑갑함과 위협과 혼돈을 인내하면서까지 난민과 함께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우리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절차를 밟아나갈 때, 타인으로부터 살해 아닌 환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피곤함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나와 같이 공부하는 중학생 친구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간지가 나잖아요. 맨날 똑같이 하면 재미없잖아요.” 목적지를 알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걷는 이에게는 해명되지 않는 광채가 스민다. 아이 웨이웨이가 난민의 흔적으로 작품을 만든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고정관념을 벗어난 이의 아름다움을, 자기 자신이 되려는 자의 존엄을 알리려는 것이다. 우리의 미래에, 인간의 미래에 이러한 광휘가 있다면 좋을 것이다.


아이 웨이웨이,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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