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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Feb 02. 2022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

<킹메이커>

‘사랑의 매’는 사랑인가 매인가. 사랑의 매는 상인가 벌인가. 내 어머니도 나를 장동건으로 보지 않건만, 인천고등학교 영어 교사 김 모 씨는 왜 나를 <친구>의 장동건으로 봤을까. 그게 아니라면 내게 안경을 벗으라 할 이유가 없었고, 등산하는 아주머니가 등 뒤로 손뼉 치듯 팔을 뒤로할 이유가 없었으며, 뒤로 한 팔을 힘껏 앞으로 휘둘러 내 뺨을 갈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장동건이 된 후 들었던 말을 아직 기억한다. 잘 되라고 그런 거야.


그의 말에 의하면, 맞는 것은 상을 받은 것과 같다. 60명 가까운 인원 중에 나만 특별대우를 받았다. 특별한 존재로 여겨진 셈이다. 그리고 두각을 드러내는 이에게 주어지는 것이 상이다. 고로 내가 받았던 건 곧 상이라는 논리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걸 벌이라 생각한다. 불쾌한 자극, 원치 않았던 고통으로 그 일을 상기한다.


그렇다면 사랑의 매는 때리는 사람에겐 상이고 맞는 사람에겐 벌인가. 한 사디스트가 형사법 강의를 들은 후에 마조히스트 연인에게 더 이상 채찍을 들지 않을 거라 선언했다.


S : “더 이상 널 때릴 순 없어. 형법 260조에 의해 사람의 신체에 대하여 폭행을 가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500만 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해지거든.”

M : “무슨 소리야. 어젯밤에 그랬잖아. 날 사랑한다고! 간밤의 채찍질은 다 무의미했던 거야? 이젠 날 사랑하지 않는 거야? 왜 날 벌하는 거야!”


이때 ‘사랑의 매’는 말 그대로 사랑이요, 상이다. 마조히스트에게는 구타의 부재가 곧 사랑의 부재다. 사랑 안에 거하지 못하는 건 처벌을 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사랑의 매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어떨 때는 벌이고 어떨 때는 상인 것이다.


이는 비단 사랑의 매에만 국한되진 않는다. <극한직업>의 고 반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 <기생충>의 기택도 보탠다. “가장 완벽한 계획이 뭔지 알아? 무계획이야.” 그러니까 갈비인지 통닭인지 알 수 없는 상태, 완벽한 계획이자 무계획인 상태,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양상이 한데 얽혀 분간할 수 없는 상태가 존재한다. 마치 사랑의 매처럼.



<킹메이커>는 위의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서창대(이선균)는 약방 주인이자 선거 전략가를 꿈꾸는 자다. 그는 정치인 김운남(설경구)을 존경한다. 운남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들 거라 믿기 때문이다. 창대는 자신을 써달라는 부탁과 함께 선거에 임하는 전략을 적은 편지를 운남에게 보낸다. 그리고 독초이지만 적절히 쓰면 해독제가 되기도 한다는 애기똥풀을 편지에 넣는다. 마치 자신이 애기똥풀이라는 듯이.


김운남은 현실 감각을 지니면서도 현실에 휩쓸리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여전히 이상이란 말뚝을 부여잡는다. 창대가 운남에게 사업과 정치는 다르지 않다고, 사업이 돈을 버는 일이라면 정치는 표를 버는 행위라고 말한다. 그러자 운남이 답한다. 사업은 돈을 버는 게 목표가 되지만 정치는 표를 버는 게 목표가 될 순 없다는 것. 그에게 정치란 상인의 현실감각과 서생의 문제의식 사이에 균형을 잡는 일이다.


창대와 운남은 닮았고, 닮지 않았다. 정치가 이상과 현실의 복합물임을 알았단 점에서 둘은 닮았다. 창대가 정치의 주요 성분을 현실로 봤던 반면 운남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서 둘은 닮지 않았다. 운남에게 정치란 이상과 현실의 관계이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잡아먹는 것이 아니었다. 이상에만 치우치면 광신도가 되고, 현실에만 매몰되면 속물이 된다. 어느 하나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운남은 많이 실패했고, 종종 오판했지만, 보기 싫은 사람인 적은 없었다.


운남은 계속해서 빛났고, 창대는 흑막 속에서 누군가에겐 효과적일 누군가에겐 천박할 전략을 수립했다. 빛이 강해지면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 운남은 목포의 국회의원이 되고, 신민당의 대선 후보가 되고, 박 대통령과 맞상대하는 자가 되는데, 그럴수록 창대는 본인을 어둠 속에 감출 수밖에 없다. 어두운 곳에서 더러운 손을 휘두르는 자가 운남과 함께한다는 걸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창대는 운남의 그림자이다. 창대와 운남이 처음 독대하는 순간, 둘은 나란히 소파에 앉는다. 하지만 운남 옆에는 스탠드가 빛을 내뿜고 있기에 창대는 운남의 그림자에 휩싸인다. 창대에겐 명함이 없고 직함이 없다. 오직 그가 행한 흔적을 통해서만 그의 존재를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중앙정보부에서 김운남 캠프의 선거 전략가를 찾을 때, 카메라는 창대를 비추지 않고 그의 그림자만을 비춘다. 흔적으로만 남는 사람, 창대는 그림자가 되었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도 힘들게 사는데, 그림자가 된 사나이는 오죽하랴. 결국 운남의 그림자는 폭발한다. 대선 정국, 김운남의 자택에서 벌어진 폭파 사건을 계기로 둘은 이야기를 나누고, 갈등한다. 운남은 4·19나 3·1 운동에서 볼 수 있듯 국민은 위대한 존재이니 그들을 믿고 가야 한다고 말한다. 창대는 국민이 대체 누구냐고, 걔들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존재일 뿐이라고 답한다. 운남이 되묻는다. “그럼 쟈들[독재 세력]과 우리가 다른 게 뭐당가.” 창대가 답한다. “저쪽은 틀리고 우리는 옳은 거요.”



여기서 운남은 홍보, 전략, 정치공학이 필요함을 인정하면서도 시민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반면 창대는 현실적인 수단, 즉 조작과 공작이 전부라고 말한다. 이 일을 계기로 운남은 캠프에서 창대를 내보낸다. 그림자에서 벗어나 볕 잘 드는 공간에서 일하고 싶었던 창대는 여당 캠프를 찾는다. 그리고 여태 했던 것처럼, 누군가에겐 효과적일 누군가에겐 천박할 전략을 만든다. ‘지역 갈등’을 발명한 것이다. 이때 중앙정보부장이 묻는다. 영호남을 가른 게 우리란 걸 알면 역풍이 불지 않을까요? 창대가 말한다. 성난 소에겐 붉은 깃발만 보이지, 깃발을 흔드는 투우사는 보지 못하는 법이요.


여기서 창대는 반면교사의 전형이다. 부정적인 면모로 관객에게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서 성난 소에서 벗어나는 법을 배울  있다. 붉은 깃발이 보일 , 무작정 돌진할  아니라 누가 깃발을 흔드는 지를  , 그리고 의도적으로 분노와 혐오를 조장하는 작전이라면 거기에 휘말리지  . 끝까지 성난 소이기를 고집한다면 붉은 깃발에 달려들어도 되지만  결과만큼은 알아야 한다. 운이 좋다면 투우사를 찔러 죽일  있지만 대부분의 소는 투우사의 칼에 죽는다. 그리고 운이 좋은 경우에도 금세 운이 다한다. 투우사에게 치명상을 입힌 소의 어미 도살되기 때문이.


영화에 나오진 않지만 관객 대부분은 김운남이 어떤 운명을 맞이할지 알고 있다. 그는 1971년에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할 것이고, 73년에 정보부에 의해 납치될 것이다. 이후 가택에 연금될 거고, 76년에 구속될 것이다. 80년에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사형을 언도받고, 82년에 간신히 망명하지만 85년에 다시금 연금될 것이다. 그리고 87년에 또다시 선거에 패배하고 이후로도 숱한 고통을 감내해야 하고 인내를 강요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97년 대선에서 승리하여 98년에 대통령이 될 것이다. 그리고 2009년에 죽지만, 고대 로마인이나 애니메이션 <코코>의 등장인물은 김대중이 아직 죽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2022년 현재까지 그를 기억하고, 기리고, 닮으려는 이가 많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를 죽지 않게 했는가. 무엇이 그에게 불멸을 주었는가. 대립되는 것에서 균형을 잡는 것, 이상을 향하면서도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것, 현재에 충실하면서도 나아갈 길을 잊지 않는 것, 자신의 길이 옳다고 믿으면서도 내면의 악의를 자각하고,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그 안에 선의를 놓치지 않는 것.


안다. 거의 불가능하단 걸. 그래서 나는 이중의 의미를 저버리고 하나를 택한다. 나는 똑똑한 선생, 너는 멍청한 학생. 나는 세상을 바꿀 학자, 너는 바꿔질 대중. 내 거주지는 고상한 이상 세계, 너의 주거지는 천박한 속세. 나는 지금도 맞고 그때도 맞았지만 너는 지금도 틀리고 그때도 틀렸지.


그리고 하나 더 안다. 이런 모습은 상당히 재수가 없다는 걸. 인류 역사상 손꼽힐 정도로 재수 없는 게 아니라면, 보통의 재수 없음은 금세 망각된다. 누구에게나 삶은 힘들고, 그렇기에 재수 없는 사람까지 기억할 여력이 충분치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대 로마인과 <코코>에 따르면 잊히는 건 곧 죽는 것이다.


이중의 의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만, 불가능의 대가는 불멸이다.


주의할 점은 어설프게 황희 정승 흉내를 내선 안 된다는 것. 아아, 모든 것엔 이중의 의미가 있구나. 너의 말이 옳구나. 또 그의 말도 옳구나. “아니 선생님, 대관절 누가 옳다는 것입니까? 선생님의 판단은 그릇되었습니다.” 오오, 당신의 말도 맞구나. 이래선 안 된다. 사랑의 매는 거의 모든 때 체벌이고, SM 플레이에선 애정표현이다. 어떤 것이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는 건 그걸 여러 관계 속에서 살피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결정이 괜찮다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결단을 유보해도 된다는 뜻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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