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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Dec 27. 2021

과거진행형과 노이즈 캔슬링

<드라이브 마이 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자기 과시 a.k.a. 비판



철학과의 신입생은 책을 비판적으로 읽어보란 제안을 받는다. 성적에 맞춰 입학한 사례를 제한다면, 철학과에 지원한 이 거의 전부는 이미 삐딱하다. 뭐가 잘못된 건진 모르겠지만 만사가 싫은 청소년, 다 갖춰졌지만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끼는 위기의 주부와 유사한 것이다. 처음으로 자신의 비뚤어진 마음을 인정받은 것에 고무된 철학도는 기필코 텍스트의 허점을 발견하고, 물어뜯기로 다짐한다. “철학은 시대의 ‘아들’이라니 대철학자라는 헤겔조차도 남성 중심성이라는 당대의 한계를 넘어서진 못했군요” 같은 점잖은 말을 통해 자신의 체통을 유지하면서도, 이름난 철학자보다 자신이 더 나은 존재라는 걸 만방에 알리고자 한다. 세상을 무시하면서도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 한다.


철학도의 자세, 즉 헐뜯으려는 동시에 자신을 뽐내려는 비판은 각종 강연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에게 한 시간 오십 분의 강연은 십 분의 질의응답을 위한 것이다. 백십 분 동안 남성-여성 이분법이 잘못된 거라 피를 토하며 소리 지른 강사에게 “그런데 여장을 한 남자를 보면 좀 신경질이 나거든요”라 질문한 청중, 기성의 공산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공산주의가 필요하다고, 제발 다시 생각해보자고 읍소한 강연자에게 “공산주의는 이미 망했잖아요”라고 질의한 참석자를 나는 기억한다. 이들은 코로나 바이러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줌 회의실 어딘가에서 ‘비판’을 늘어놓고 있을 거다. 그러니까 자기를 늘어놓고 있을 거다.


가족오락관의 교훈



전설의 쇼 프로그램 <가족오락관>에는 ‘고요 속의 외침’이란 코너가 있다. 네 명의 참가자는 시끄러운 소리가 나오는 헤드폰을 쓴 채 스크린을 등지고 있다. 사회자 허참이 가장 가까운 선수의 등을 두들기고, 호출받은 선수는 뒤돌아서 스크린에 있는 단어를 본다. 이제 이 자에게는 전해야만 하는 ‘진실’이 생겼다. 두 번째 참가자의 등을 두들기고 있는 힘껏 소리 지른다. 또렷한 입모양으로 사자후를 내뱉는다. 이런 식으로 진실은 마지막 참가자에게까지 전달된다. 청중과 시청자는 진실의 왜곡에서 쾌감을 느낀다. 가령 “엘비스 프레슬리”가 “MBC 프로레슬링”이 되는 데서 재미를 보는 거다.


‘고요 속의 외침’에는 어떤 교훈이 서려 있다. 첫째는 소음 속에선 제아무리 마음을 전달하려 노력하여도 상대에게 가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사코 내 마음을 전달하려 해도 굉음 속에선 소통이 되지 않는다. 둘째는 직업윤리에 대한 것이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마지막 선수에게 전한다고 해서 참가자에게 무엇이 남는가. 한우 안창살 세트를 탐하기엔 코미디언 김학래 씨는 너무도 돈이 많다. (잠실 올림픽 공원 부근에서 그는 부인 임미숙 씨와 함께 ‘차이나 린찐’이란 고급/거대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제주도 여행권으로 가수 현숙 씨를 움직일 수 있다 판단한다면 그녀의 돈벌이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차라리 현숙을 감동시킬 수 있는 건 마음, 효[孝]일 것이다.) 이들이 애를 쓰며 말을 전하려는 것은 연예인으로서의 직업윤리 때문이다. 탤런트도, 가수도, 코미디언도, 엠시도, 방송인도 기어이 “엘비스 프레슬리”를 전하려고 하는 건 이들이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한 결단 때문이다. 그리고 직업윤리에 충실한 이들 중 누군가는 광채에 휩싸이게 된다. 빛나는 존재, 스타가 되는 것이다.



과거 진행형



<드라이브 마이 카>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전작 <해피 아워>에 비해 상영 시간이 짧다. 328분보다는 179분이 짧으니까. 그럼에도 잘 만든 전가복(全家福) 요리처럼 여러 재료가 각각의 맛을 내면서도 조화를 이루기도 하기에,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음미해야 할 것이 여럿이다. (대략 살펴도 세 개의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아내가 창작하는 이야기, 다른 하나는 주인공의 이야기, 또 다른 것은 주인공이 연출하는 연극 이야기다. 게다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인물을 절대 허투루 대하지 않아서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에게 서사가 있다.)


배우이자 연출가인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와 각본가 오토(기리시마 레이카)는 부부이다. 가후쿠는 전가복의 가복, 즉 가족이 행복하다는 뜻이다. 오토는 음(音), 그러니까 사운드란 의미이고. 이름처럼 가후쿠는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걸 중시하고 오토는 소리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 또는 이야기를 전한다. 둘이 관계를 맺을 때 오토는 상상한 이야기를 전하고, 가후쿠는 그걸 기억해서 다음날 오토에게 다시 말해준다.


그런데 가후쿠에겐 맹점이 있다. 백내장에 걸렸기 때문이다. 한쪽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다른 쪽으로 균형을 맞추기에 백내장에 걸렸단 걸 자각하긴 쉽지 않다. 가후쿠는 교통사고 후의 건강 진단에서야 자신이 백내장에 걸렸음을 알게 된다. 사실 가후쿠는 어렴풋이 부부 사이의 균열을 보았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 외도하는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후쿠는 둘의 관계가 붕괴될까 이를 말하지 못한다. 동시에 오토의 이야기에도 집중하지 못한다. 외간 남자와도 이럴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도 출근은 해야 하는 법. 아내 오토는 오늘 저녁에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냐고 말하고, 남편 가후쿠는 부부 사이에 무슨 그런 얘기를 하냐고 반문하지만 영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순 없다. 평소보다 늦게 귀가한 가후쿠는 병으로 죽은 오토의 시신을 바라본다. 극장이라 시간을 확인할 순 없었지만 체감하기론 30-40분은 지났을 법한 이 시점에 오프닝 크레디트가 오른다. 2년 뒤라는 자막과 함께. 여태 봐온 현재 진행형은 사실 과거였다. 어떤 사람은 과거 진행형으로 산다.


밀실과 바벨탑



본 이야기와 함께 카메라는 전에 위치하지 않았던 곳에도 자리한다. 아내의 죽음 이전, 즉 프롤로그에서 카메라는 가후쿠가 타고 있는 차를 측면에서 또는 부감으로 담아냈지만, 오프닝 크레디트 이후로는 가후쿠 얼굴의 정면을 잡기도 하고 가후쿠의 시점에서 운전석 유리 너머를 보기도 한다. 이제 가후쿠는 현재를 보려는 걸까. 이러한 기대는 금세 꺾인다. 가후쿠는 대본 숙지라는 명목 아래 아내가 녹음한 테이프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 루틴은 제멋대로의 삶에 규칙을 부여하는 활동이다. 가후쿠는 현재의 정처 없음을 과거라는 표지판으로 정리한다.


문제는 가후쿠가 새로 부임하게 된 히로시마 연극단의 규율이다. 소속 아티스트는 직접 운전해선 안 되고, 극단 소속 운전사가 모는 차에 타야 한다는 거다. 가후쿠는 내키기 않았지만 이내 극단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운전사 미사키(미우라 도코)가 모는 차가 마치 무중력 상태에 있는 것처럼 편안했던 까닭이다. 또 미사키의 침묵도 마음에 들었다. 후에 관객은 미사키가 상처로 태어난 사람이고, 상처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녀가 어머니의 폭력과 고향을 파괴한 산사태로 인해 운전사가 되었단 걸, 가후쿠가 일찍이 잃었던 딸이 살아 있었다면 미사키와 동갑이란 걸 알게 될 것이다.


한편 가후쿠가 연출하는 연극은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이다. 특이한 건 아시아 여러 지역의 배우를 캐스팅해서 각자의 언어로 대사하게 한다는 것. 가후쿠의 연극은 일본어, 한국어, 한국어 수어(手語), 만다린어, 타갈로그어, 영어 등으로 진행된다. 영화는 자동차라는 밀실과 연극 무대라는 광장을, 무중력 같은 침묵과 바벨탑과 같은 소통 단절의 상황을 오간다. 이러한 왕래에서 운전사는 말없이 자기 직업에 전념하고, 배우들은 가후쿠의 지시에 따라 감정을 배제한 채 있는 그대로의 음(音)을 들으려 한다.


계속되는 연습에서 답답함을 느낀 가후쿠는 운전사에게 아무 곳이나 가 달라고 부탁한다. 히로시마에 온 후 다른 곳을 다녀보지 못했던 거다. 미사키는 다소 의외의 장소로 그를 데려간다. 쓰레기 소각장이다. 거대한 기계 삽이 쓰레기 더미를 다른 통으로 옮겨 떨어뜨릴 때 마치 눈이 내리는 것 같다고 운전사는 말한다. 가후쿠는 미사키 역시 마음속에 각종 폐기물을 쌓아두었음을, 그러한 쓰레기와 함께 그녀의 마음 역시 부패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후에 가후쿠는 쏟아지는 쓰레기처럼, 쏟아지는 산사태가, 쏟아지는 눈이, 미사키가 살던 집을 덮쳤다는 것도 깨닫게 될 것이다.


가후쿠는 들을 수 있지만 말할 순 없는, 수화로 연기하는 한국인 배우 이유나(박유림)와 일본어, 영어, 한국어, 한국어 수화를 오가며 통역하는 공윤수(진대연)가 부부임을 알게 된다. 가후쿠를 초대한 식사 자리에서 윤수가 이를 전한 것이다. 이때 유나는 자신의 말이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은 흔한 일이라고, 때로는 말하는 것보다 소리를 듣고 상대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짙은 눈썹을 지닌 유나의 남편은 자기가 부인의 말을 100인분만큼 들어주기로 했다며 너스레를 떤다. 이때 미사키는 말없이 부부가 키우는 개를 바라보고, 가후쿠는 말하지 않아도 행복한 가족을 바라보고 있다.



노이즈 캔슬링이 들려주는 것



얼마나 지났을까. 연출가로서 가후쿠는 무언가를 본다. 자기감정을 제하고, 상대의 반응을 예상하지 않고, 다음의 대사를 대비하지 말고, 그저 온전히 상대의 말을 듣기만 하라는 게 그의 주문이었다. 마침내 주문이 이뤄지는 마법 같은 순간. 이유나와 재니스 창(소냐 위엔)의 리허설에서 뭔가가 일어난 것이다. 자기를 과시하지 않았을 때 드러나는 자기, 예측하지 않은 채 받아들이는 우연, 준비하지 않고 맞이하는 현재에서 가후쿠는 살아있는 무언가를 본다. 그리고 살아있다는 건 현재에 존재한다는 것과 다를 수 없다.


가후쿠는 상처 입은 사람으로서도 뭔가를 본다. 미사키 덕분일까. 가후쿠는 침묵에서 또렷해지는 무언가와 대면한다. 거의 모든 장면이 인상적이지만 후반에 나오는 몇 초간의 완벽한 침묵의 순간은 진정으로 경이로운 순간이다. 이때를 적확히 기술하는 문장은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가 아니라 ‘침묵이 들린다’가 될 것이다. 노이즈 캔슬링 같은 침묵을 듣는 이는 세상의 소음을, 과거의 우려와 불안과 회한을 들을 수 없다. 가후쿠는 영화의 후반에서 처음으로 소리를 지른다. 소음 아래 가려져 있던, 말해야 했지만 말하지 못했던 걸 끄집어낸 것이다. 가후쿠 덕분일까. 미사키는 자기 안에 있는 것, 꽃 피우지 못한 싹 혹은 열매 맺지 못한 꽃을 꺼낸다. 그녀가 눈밭에 던지는 꽃은 옮겨지지 않은 쓰레기, 처리되지 못한 폐기물, 애도되지 않은 상처일 것이다. 이제 미사키는 눈 덮인 과거에 상처를 던진다. 하나, 하나씩.


감독은 철두철미하게 혼자일 때는 침묵할  없다고 말한다.  안에는  톤의 쓰레기가 있고,  않은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시인 카토의 말을 변주하자면,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활동적이고 혼자 있을  가장 외롭지 않다. 홀로 있을  우리는 내면의 울부짖음에 시달리고, 온갖 상념에 휩쓸린다. 진정으로 침묵할  있는 것은 마음을 열어놓는 서로가 함께할 때이다. 나는 너의 말을 기다리고, 너는 나의 말을 기대하지만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의 마음은 네게  있고, 너의 정신은 내게  있다. 각자의 내면에서 울리는 노이즈는 캔슬링 된다. 소통을 통한 침묵, 침묵을 통한 소통에서 가후쿠와 미사키와 이유나와 공윤수는 삶을 견딜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우리도.


어떻게 마음을 여는 상대를 만날 것인가. 그때까지 어떻게 지긋지긋한 일상을 참아낼 것인가. 여기서는 안톤 체호프의 지혜를 빌릴 필요가 있다. 그는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서, 가능하다면 타인을 위해서 일하라고 주문한다. 다음은 <바냐 아저씨> 중 일부이다. “우리가 무얼 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야만 해요. 그래요. 우린 살아야 해요. 우리 앞에는 길고 긴 밤과 낮으로 이어지는 여정이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는 운명이 우리에게 떠안긴 짐을 견뎌야 하죠. 쉼 없이 누군가를 위해 일해야만 할 거예요. 그렇게 우린 늙어갈 거예요. 마침내 우리의 마지막 시간이 왔을 때, 비로소 무덤 너머의 것과 겸손하게 마주하게 될 테지요. 우리는 지난 삶을 돌아보며, 충분히 고통스러웠고, 눈물을 흘렸으며,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말할 거예요. 그리고 신은 그런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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