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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Dec 11. 2021

집에 가야 할 시간

<그래비티>


일런 머스크는 화성 이주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국내에도 “화성 갈끄니까” 캠페인(?)이 잘 알려져 있다.     

약간의 과장이 허용된다면, 현대인은 이미 우주인이지 않을까? 우주에는 중력이 없고, 동서남북이 없고, 위아래 역시 없다고 한다. 매질이 없어 음파가 전달되지 않으니 소리도 없단다. 이는 현대인의 조건과 같은 꼴이 아닐까.     


이끄는 힘도 없고, 향하려는 곳도 없고, 안내의 음성도 없다. 여태까지의 삶이 거짓이란 건 알겠는데, 어디로 나가야 할지는 모르는 상태. 삶의 중심이랄 게 없는 상황. 별자리는 미세 먼지에 가려졌고, 나침반은 고장 났다. 길을 가늠할 수도 없다. 이것이 현대인의 조건이다. 우주의 미아와 같은 신세.     


무중력의 공허 때문일까. 아니면 대화를 나누고, 이해를 공유하고, 같이 사랑에 빠지고 하는 등의 삶을 버티게 하는 진정제를 누리지 못한 탓일까. 누군가는 자살로 지구를 떠난다. 몇몇은 이 세계에 후손을 남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더 많은 이는 표면을 떠돌 듯이 되는 대로 산다. 여기저기를 떠다니니 어지럽다. 그저 어지럽다.     


<그래비티>는 끝없이 부유하는 현대인을 그린다. 라이언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는 우주인이다. 지구에서 벗어나고 싶어 우주에 왔다.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가 우주에 와서 제일 좋은 점이 무어냐고 물으니 ‘고요함’이라 답할 정도다. 눈치 없는 코왈스키는 쉴 새 없이 떠들어 댄다. 어디 세상사가 내 마음대로 되던가. 한편, 우주선을 수리하던 둘은 본부로부터 임무를 중지하란 말을 전해 듣는다. 미사일에 맞아 폭발한 위성 잔해가 폭풍을 일으키며 그들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파편이 둘을 덮친다. 벗어나기도 쉽지 않다. 추진력을 얻을 수 있는 코왈스키의 제트팩 연료는 바닥을 보이고, 스톤 박사의 산소통도 소진 직전이다. 하나의 끈으로 연결된 둘은 다른 우주선을 찾아 우주를 떠돈다. 그 과정에서 라이언 박사는 자신의 슬픔을 털어놓는다. 네 살 된 딸이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 또 비극을 전해 들을 때 운전하고 있었기에, 딸의 죽음 이후에는 멍하니 운전만 했다는 것. 땅에서 표류하던 스톤 박사는 이제 우주에서 표류한다.     


간신히 다른 우주선에 도착한 둘. 하지만 중력이 없는 상황에서 몸을 의지대로 움직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스톤 박사의 발은 운 좋게도 우주선에서 나온 끈에 얽혀들지만, 코왈스키에겐 스톤 박사와 연결된 줄이 전부다. 코왈스키 때문에 스톤 박사를 붙잡고 있는 줄까지 느슨해지고, 결국 코왈스키는 스스로 박사와의 줄을 푼다. 놓을 때는 놓아줄 줄도 알아야 한다며. 그리고 반드시 지구에 돌아가라고 말하며.    


출처 : www.psychologytoday.com/us/blog/what-shapes-film/201310/gravity-developmental-themes-in-space

 

코왈스키를 잃은 스톤 박사는 가까스로 우주선 안에 들어간다. 여기서 촬영 감독 엠마누엘 루베즈의 재능이 폭발한다. 삼년 연속 아카데미 촬영상을 받았으니, 루베즈는 이미 찬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루베즈에게 가닿지 않을 나의 말은 그저 감탄이 될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20분 가까운 롱테이크를 선보였지만 이 장면의 감동은 그 이상이다. 우주복을 벗고 동그란 문 앞에서 360도로 회전하는 라이언은, 우리 모두가 경험했지만, 그 누구도 육안으로는 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뱃속에서 머물렀던 시기를 온전히 카메라에 담아낸다. 신생아가 세계에 등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처럼, 스톤박사도 코왈스키를 떠나보낸 후 목적을 세운다. 지구로 돌아가 살아남는 것이다. 딸을 잃고 삶의 방향도 잃은 스톤 박사는 이제 자기를 찾아 지구로 향하는 라이언이 된다.     


귀환을 시도하는 라이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이 보기에 예상되는 결과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멀쩡한 상태로 내려가 멋진 모험담을 들려주거나, 앞으로 10분 안에 타 죽는 거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밑져야 본전(no harm, no foul[다친 사람이 없으면 된 거다])이니까.      


본전이라고? 괜찮은 거라고? 죽으면 본전이 아니라  잃는  아닐까? 아니다. 진짜 밑지는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상태로 사는 , 모든  간절히 갈망하게 하는 죽음에 다가가지 않고 유사-죽음(권태, 무기력, 우울증 ) 중독되어서 삶을 좀먹게 내버려 두는 , 마지못해 산다면서 생존에만 집착하는 것이다. 멍한 상태로 비타민을 목구멍에 털어 넣을 , 스트레스를 풀겠다고 끝없이 배달 음식을 시킬 , 그러면서도 건강만을 끔찍이 챙기면서 변화의 가능성과 기회 모두를 멀리할 , 기존의 질서를 맹신하고 숭상할 때가 진정한 의미의 비참함이다.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말은 우리 삶에 가장 끔찍한 주문이다.     


스톤 박사는 딸을 잃은 후 딸의 흔적과만 관계를 맺었다. 그 외의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하지만 딸은 이제 없다. 딸과의 관계는 무(無)와의 관계이고, 다시 말해 아무것과도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다. 지나간 것을 잘 떠나보내지 못할 때, 아니면 멍하니 있을 때, 해야 할 일을 찾지 못할 때, 우리는 철저히 고립된다. 아무것과도 상관없이 남겨진 채 말이다.     


라이언은 이제 자기가 만들 집으로 향한다. “집에 가야 할 시간이다(It’s time to go home).” 스톤 박사가 우주선 안에서 새로 태어난 것은 나아가야 할 길을 얻었을 때였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내가 가고자 하면 그게 길이 된다는 말은 결코 진부할 수 없다. 익숙하다 해도, 진정으로 이 말을 받아들인 자의 삶의 궤적은 달라지니까. 가고자 하면 그곳이 집이 된다. 그리고 코왈스키의 말처럼, 가겠다고 했으면 가야 한다.     


집으로 가는 길엔 허무와 공허와 무기력과 권태와 자살 충동의 ‘고요함’은 없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아닌강과 동행할 수도 있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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