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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Dec 14. 2021

밑 빠진 독과 지진

<해피 아워>


아무리 먹어대도 허기가 질 때, 말술을 마셔대도 취하지 않을 때가 있다. 목구멍이 재떨이 인양 담배를 펴도 속이 차지 않을 때가 있다. 쇼핑몰 장바구니에 최대치로 물건을 넣고 그 물건을 다 샀는데도 허탈할 때, 친구와 실컷 낄낄 대고 온갖 이야기를 나누었는데도 외로울 때, 그럴 때가 있다. 분명 모든 것을 점검했음에도 집으로 되돌아가 가스레인지 밸브를 잠갔는지 확인하고픈 기분이 있다. 분명 빠짐없이 짐을 챙겼고 몇 번을 확인했음에도 무언가를 빼놓은 기분이 있다. 텅 빈 마음, 무언가 빠진 느낌, 이는 우리가 ‘밑 빠진 독’ 신세란 걸 암시한다.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는 120시간의 근무와 불량식품을 권한다. 그 역시 텅 빈 마음을 채우려는지 연일 술을 마신다. 어쨌든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면, 몸을 상하게 하는 맛을 느끼다 보면, 고주망태가 되어서 해롱대다 보면, 종종 허무함을 잊기도 한다. 그러나 허무함을 지우기 위해 생명을 지울 순 없는 법이다.


인간이란 항아리 안에는 고추장일지, 간장일지, 된장일지 모를 뭔가가 잔뜩 들어 있는데, 기이하게도 항아리 밑이 빠져있다. 그래서 내면이 텅 빌까 사람들은 계속해서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다. 스마트 폰의 정보를, 기름진 음식과 독한 술을, 신제품과 신제품을 집어넣는다. 고된 업무로, 키보드 배틀로, 덕질로, 스토킹으로, 하여간 뭐든 해서 빈 곳을 채우려 한다. 근본주의적 성향을 지닌 사람 중에선 사상이나 종교 등으로 바닥을 보수 공사하기도 한다. 퍼부은 물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견고한 토대를 만드는 것이다. 그럼에도 가끔씩, 이 모든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단단해 보였던 토대가 부서질 때, 그리하여 깨진 밑이 드러날 때, 밑 빠진 곳 너머의 공백이 드러날 때가 있다.


재난은 평범과 비범을 가리지 않는다. 빼어나단 이에게도 어김없이 부서짐의 순간이 있다. 가장 극적인 사례 중 하나는 버트란트 러셀의 경우이다. 그는 ‘집합’이란 논리로 세상을 빈틈없이 설명하려 했다(중·고등학교 때 나를 포함한 많은 이가 유일하게 반복해서 공부했던 그 ‘집합’이다). 러셀은 화이트헤드와 함께 1+1이 왜 2인지를 밝히기 위해서 1000페이지 이상의 책을 쓰기도 했다(이 책을 읽은 사람은 러셀, 화이트헤드, 그리고 괴델 셋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모든 것의 원리를 분명히 하여 무너지지 않는 독의 밑을 만들려고 했던 러셀이었지만, 그런 그에게도 균열은 찾아온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살고 있던 부인과 이혼해야겠다는 생각 아니 확신을 품게 된 것이다. 논리의 전도사는 결국 논리 없이 이혼을 한다.


이렇듯 우리 삶엔 그간 애써 일군 토양이 갈라지고, 흔들리고, 꺼져버리는 순간, 지진이 일어나는 순간이 있다. <해피 아워>는 지진을 만난 이들의 이야기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영화의 시작부터 이를 분명히 한다. 첫 장면에서부터 카메라는 깨진 하늘을 비춘다. 파란 하늘에는 균열과도 같은 흰색 구름이 퍼져있다. 깨져버린 항아리의 밑을 보듯 카메라는 이내 어두운 곳을 응시한다. 곧 카메라는 어둠을 뚫고 나오는데, 이때 케이블카 역시 터널을 뚫고 나온다. 케이블카에는 네 명의 주인공이 앉아 있다. 이들은 오랜만에 만난 37살 동갑내기 친구 사이로, 산 정상의 풍경을 기대하는 중이다. 그러나 감독은 조리 있는 세계, 즉 독 안의 세계를 다루려는 게 아니다. 부조리한 세계, 다시 말해 지진으로 밑이 빠져버린 그 어딘가를 다루려 한다. 그래서일까. 이들은 애써 정상에 올랐건만 비와 안개로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아카리는 풍부한 감정의 소유자다. 뒤풀이 자리에서 공감대가 통한다는 이유로 처음 본 사람과 어깨동무를 하며 ‘러브샷’을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아카리를 버티게 하는 건 간호사로서의 신념이다. 외도한 배우자와의 이혼이라는 지진을 겪었기에, 직업윤리가 삶을 지지하는 원리가 되지 않을까 해서 더욱 일에 집중하는 눈치이다.


반면 후미는 이성적인 인물이다. 모든 것에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각 영역이 확실히 나뉘어야 한다. 비슷한 직업을 가진 남편과의 협업조차도 그녀에게는 달갑지 않다. 사생활과 직장 생활의 구분이 흐릿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후미는 어디에 속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흔들리는 무언가가 있음을 느낀다. 그럼에도 이 단단한 논리가 삶의 토대가 될 수 있음을 믿는다.


사쿠라코는 자신이란 밑 빠진 독에 남편과 아들이란 물을 잔뜩 부었다. 그녀는 남편과 아들이 자기 탓에 새어나가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사쿠라코는 자신이 부서져 있다 생각한다. 부족한 탓에 상대를 담아내지 못한다 생각한다. 자기혐오라는 파열을 겪는 사쿠라코는 그만큼 더 가족에 헌신하고, 이러한 헌신이 그녀의 안정이 될 거라 여긴다.


반면 준은 밑 빠진 곳을 본 인물이다. 남편과의 사랑, 자녀를 가질 수 있을 거란 기대가 깨져버린 밑으로 모두 빠져나갔다. 이혼 소송이 어찌 될지, 앞으로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고, 확실한 건 튀김집에서 해야 할 고된 노동뿐이지만, 어쩐지 준은 즐거워 보이기까지 한다. 몰락의 스피드도 짜릿함일 수 있을까. 준은 자신의 기반이 무엇인진 몰라도, 이제 남에게 희생하며 살진 않겠다고 다짐했다.


폭우와 안개로 둘러싸인 산 정상. 아카리와 후미와 사쿠라코와 준은 안개가 마치 자신들의 앞날 같다며 수다를 떤다. 넷은 작은 정자에서 샌드위치와 주먹밥을 먹으며 차후의 여행을 기약한다. 약속을 잡기 위해, 일상의 빈 곳을 찾기 위해, 넷은 다이어리를 꺼낸다. 그간 캘린더의 빈칸에 성실하게 일정을 채워 넣었지만 어디서든 빈 곳은 있기 마련이다. 꽉 찬 독에도 빠진 밑이 있듯이. 이때 후미는 자신이 주최한 워크숍에 참여한 후에 온천으로 여행을 가자고 제의한다.


워크숍에 참가하는 넷. 대략 열 명이 참여한 워크숍의 주제는 ‘중심’이다. 강사는 우카이인데, 감독은 영화가 지진에 대한 것임을 강조한다. 우카이는 의인화된 지진이다. 강사로서의 우카이는 동일본 대지진 때 태어났다. 지진 피해의 복구 활동에 참여한 그는 떠밀려온 잔해와 파편을 해변에 한 줄로 길게 늘어뜨리는 퍼포먼스로 명성을 얻었다. 이때의 나열은 단순한 늘어뜨림이 아니라, 각 물체의 무게중심을 새로 잡은 후에 배열한 것이다. 가령 네 개의 다리를 가진 의자를 한 다리로만 버티게 하는 식으로 물건을 세우고 열 맞춘 것이다. 우카이는 지진 복구 때부터 중심이란 주제에 집중한다. 워크숍의 목표는 다양한 퍼포먼스를 통해서,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중심을 찾으려는 것이다.



감독은 영화의 후반에도 ‘우카이=지진’ 공식을 암시한다. 우카이의 동생은 오빠가 알맹이 없는 인간이라 말한다. 속을 알 순 없으나 바깥에서 두들기면 요란하게 소리가 울리니 속이 텅 빈 것이 아니겠냐면서. 본래 지진은 내실을 가지고 있지 않다. 상대의 내실을 부술뿐이다. 요란한 소리는 그때 울린다. 워크숍이 진행될수록, 또 영화가 진행될수록 항아리의 중심은 빠져버린 밑이고, 인간의 중심은 공허이며, 삶의 중심은 우연임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무게 중심을 찾으려는 이는 기존의 무게 중심을 상실한 사람이란 사실도 드러날 것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내용 이전에 형식에 구멍을 낸다. 일단 주연 배우 네 명은 감독 본인이 주최한 워크숍의 참가자이다. 연기자가 아닌 이들을 연기자로 캐스팅했다. 영화에서 진행되는 ‘중심’ 워크숍과 후반부에 소설 낭독회는 흡사 브이로그 같다. 시간도 무척 길어 각각 30분이 넘는다. 여러 장면에서 감독은 180도 상상선을 무시한다. 영화 문법의 균열을 통해 감독은 인물들을 공백과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또 웨스 앤더슨과 같은 정면 클로즈업도 적지 않게 등장하는데, 정면으로 비춘 인물의 얼굴에선 텅 빈 눈이 도드라진다. 
 

워크숍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다. 이미 균열로 빠져나가는 과정을 즐기게 된 준은, 지진에 매료된 듯 우카이를 바라본다. 매혹된 듯이, 그리하여 유혹하듯이. 우카이는 또 다른 지진도 일으킨다. 아카리에게 연애와 결혼 여부를 물은 것이다. 후에 우카이의 동생으로 밝혀질 한 여성은 또 사람을 흔드냐고 그를 타박하지만, 아카리는 남편이 바람을 피운 탓에 이혼을 했고, 현재는 연애 생각이 없음을 밝힌다. 타자마는 자기 역시 배우자의 외도 때문에 이혼을 했다며 맞장구를 친다. 이때 준이 자신도 이혼 소송 중이라고 말한다. 아카리는 친구인 자기에겐 왜 이혼 언급이 없었고, 왜 그리 중요한 말을 이런 곳에서 하냐고 신경질을 낸다. 준은, 아무도 묻지 않았기에 말하지 않았고, 지금 말하고 싶어서 말한 거라 답한다. 바닥이 깨지면 균형도 사라지는 법이다. 균형을 잃은 준은 어떻게든 새로운 질서를 찾으려 한다. 나를 중심으로 하는 삶의 자세가 그녀의 무게 중심이다.



아카리는 너무도 화가 난다. 그리고 준과 중학교 때부터 친구인 사쿠라코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음을 눈치채서 더 견딜 수가 없다. 결국 워크숍을 뛰쳐나온 아카리. 아카리처럼 30살에 준을 알게 된 후미는 노파심에 그녀를 따라간다. 아카리는 어떻게 친구 사이에서 이럴 수가 있냐고 말을 하다가, 이내 말을 멈추고 혼자 가겠다고 한다. 지금 하는 모든 말은 틀린 게 될 것 같다며. 그때 아카리와 후미의 머리 뒤로 전철이 빠르게 지나간다. 아카리와 후미의 머릿속엔 전철의 칸 수만큼 많은 생각이 지나갔을 것이다. 여태까지 좋았는데 이게 뭘까, 대체 우리에게 빠진 것이 무엇일까, 말할 수 없지만 무언가 잘못된 것 같은 이 기분은 대체 무얼까. 뭐라 말해도 틀릴 것만 같은 이 기분은.


이후 영화는 각 인물의 생활을 좇는다. 걱정이 걱정을 낳고, 불안이 불안을 낳다 보면, 어느새 걱정과 불안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잊게 된다. 영화는 준의 이혼 소송이란 흐릿한 중심을 제시하지만, 중심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각 인물의 생활사를 담아낼 때마다 그때마다의 여러 문제가 떠오른다. 거의 모든 장면에서 안정은 사실 불안을 토대로 하고 있고, 일상은 사실 이상한 기반 위에 서 있음이 밝혀진다.


안정과 불안의 이상한 뒤섞임 속에서는, 인간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인간이기에 참았던 순간이, 솔직하고 싶은데 어떻게 표현할 수 없었던 때가, 어찌 그럴 수 있냐고 따지면서도 똑같이 행동했던 기억이 있다. 넌 말할 자격이 없다고 꾸짖던 자격 없는 말이 있었고, 가족을 위해 일한다 했지만 실상 가족의 붕괴로부터 도망쳐온 발걸음이 있다. 이 모든 비겁에도 사과할 수 없었던 순간과 결국 텅 빈 바다를 응시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없었던 때가 있다. 안정이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순간들.


지진 또는 우카이는 그럼에도 네가 원하는 걸 얻어내려면 싸워야 한다고, 부러진 다리를 댄스 클럽으로 밀어 넣지만, 결국 우카이 역시 이 모든 게 무얼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 여자와 여자의 키스, 여자와 자신의 키스, 상처 받은 개인과 또 다른 사람, 이 모든 게 무엇인지, 무엇일 수 있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지진의 물음은 다음과 같다. “대체 뭐 하는 거야?” 누군가는 사라지고, 누군가는 이혼하고, 누군가는 버티고, 누군가는 바다를 본다. 어떻게든 답해야 할 건 지진이 아니라 항아리, 우리이다. 아마 무얼 말해도 틀린 게 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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