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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Dec 17. 2021

높이와 깊이

<퍼스트 카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풍경을 바꾸는 방법에는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이다. 북산에 살던 어리석은 노인은,  앞을 가로막은   때문에 불편하다. 아흔 살의 노인은 산을 옮기기로 한다. 우공의 친구이자 지혜로운 노인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타박한다. 우공이 답한다. 나에게는 자식도 있고, 손자도 있다. 자손은 한없이 늘어나지만 산은 그러지 않으니, 언젠가는 산을 평평하게 만들  있다.  말을 전해 듣고 감동한 옥황상제가 거인을 보내어서 산을 옮겨주었다는  이야기의 결말이다.


우공이산 에피소드는 지금과 같은 시대, 즉 미혼/비혼의 시대, 저출생의 시대, 무엇보다 신이 죽은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현대인은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는다. 또 우리의 노력에 감탄할 신도 사망한지 오래다. 고대 중국보다 나아진 게 있다면 그때 사람보다 우리가 장수한다는 사실인데, 100살까지 산다 해도 우공보다 10년 남짓만 더 노동할 수 있을 뿐이니, 산을 옮길 만한 시간은 못 된다. 그리고 현대인에게 추가된 10년은 우울증이나 무기력에 바쳐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는 스스로 연장된 삶을 끊어버리거나.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다. 서 있는 곳을 바꾸는 것이다. 발 딛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진다. 혹자는 이를 ‘정신 승리’라고 조롱하겠지만 이는 적절한 비판이 아니다. 움직일 수 없는 현실에서 도피해 정신만을 개조하는 게 정신 승리라면, 서 있는 곳을 바꾸는 것은 직접 발을 움직여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달리한다는 것이다. 애써 노력해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수정한다는 뜻이다. 기필코 해석의 틀을 교체한다는 의미다.



<퍼스트 카우>는 웨스턴 영화를 달리 보려 한다. 총을 들고 카운트다운을 세던 사내 대신 그들을 먹여 살리던 남자를 응시한다. 황금을 캐내어서 무역하던 사업가 대신 중국에서 온 소상인을 다룬다. 여기서의 관심은 빨리 달리는 말(馬)에 있지 않고, 한 자리에서 묵묵히 자리하는 소(牛)에 있다. 영화에서의 사건은 총격전을 통한 상대의 제거가 아니라, 한사코 만나야만 하는 두 친구의 재회이다.


의식적으로 관점을 바꾸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 대부분은 습관대로 보고, 했던 방식으로 판단하고, 익숙한 대로 생각한다. 미국 한인 사회에 널리 알려진 도시괴담은 이러한 면을 잘 알려준다. LA 한인 타운에 사는 김 씨는 북창동 순두부 앞 사거리에서 앞차를 들이받는다. 이마가 찢어져 머리에 피가 흥건한 김 씨에게 교통경찰이 다급하게 와서 물었다.


“How are you?”

“I am fine, thank you. And you?”


어지간한 충격으론 개인의 습관, 사회의 관습을 바꿀 수 없다. 감독 켈리 라이카트는 영화의 첫 장면에 거대한 배를 집어넣는다. 배는 강 위를 서에서 동으로 횡단한다. 아주 천천히. 그다음에는 배완 전혀 상관없는 어떤 여성과 개가 나온다. 산책 나온 듯하다. 개가 (아마도) 평소와 달리 바닥을 자꾸 파낸다. 여성은 뭐가 있나 싶어 땅을 손으로 긁어내고, 거기서 백골이 된 두 사람의 유해가 드러난다. 다음 화면은 1800년대를 담아내고, 여기부터 쿠키(존 마가로)와 킹루(오리온 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뭐 이 정도 가지고 “충격”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조회수를 빨아먹으려는 거냐고 물을 이도 있겠다. 조회수를 원하는 건 맞지만 이 장면이 충격인 것도 맞다. 우리는 마블 영화에서 도시 하나가 박살 나는 것을 보고도 놀라지 않게 되었다. 어지간한 거대함으로는 아랑곳하지 않게 된 것이다. <퍼스트 카우>의 첫 장면은 아주 느리고 지루하다. 게다가 화면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4:3 비율이다. 일반적인 화면에 비해서 좌우가 잘린 것 같은 비례이다. 영화는 작은 화면으로, 천천히 보여줄 테니, 최근 봤던 영화와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독해하라고 주문한다. 감독은 둥근 사각형과 같은 어색한 충격, 즉 느리고 작은 충격을 건넨다.


또한 이후에 다루는 내용 전부는 그간의 웨스턴 영화가 다루지 않았던 내용이다. 당신이 “How are you?”라고 묻는데 상대가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거예요”라고 답한다고 생각해보라. 여기에 대한 반응은 ‘노잼’이거나 충격, 둘 중에 하나다. (아마 <퍼스트 카우>에 대한 반응도 둘 중 하나일 게다.)


첫 장면의 선박을 통해 현대 문명을 비판한다고 보기에는 멋쩍다. 이 광활한 자연을 가리는 저 흉물스러운 배를 보아라, 하는 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그저 큰 배를 관조할 뿐이다. 아마도 감독은 후에 나올 작은 배와 연관 지으려는 심산에서 첫 장면을 집어넣은 것 같다. 주인공이 머물게 된 마을에 최초의 소(퍼스트 카우)가 타고 들어오는 배 역시 천천히 강을 횡단하는데, 이러한 작은 시작에서 현재의 거대함이 태어난 거라고, 그러니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것의 소박한 시작을 보자고 감독은 제안하는 것 아닐까. 감독은 기존의 독법과는 다르게 1800년대를 읽는다. 개와 함께 산책하다 백골을 발견하고 몽상에 빠지는 여성처럼.


쿠키는 서부의 사나이들에게 요리를 제공하는 사람이다. 유대인인 데다 성격도 조용한 편이라서 같은 팀 구성원에게 조롱당하고 심지어 맞기도 한다. 킹루는 쿠키에 비해선 활달하지만 중국인이다. 1800년대 미국 서부에서 중국인으로 산다는 건, 현대의 잉글리시맨이 뉴욕에서 사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게다가 킹루는 중국에서도 따돌림을 당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퍼스트 카우>의 두 주인공은 ‘지질이’ 혹은 ‘왕따’이다. 이들은 총을 쏠 줄도 모르는 것 같고, 마초처럼 술을 퍼 마시거나 음담패설을 늘어놓지도 않는다. 주변 사람과 싸우지도 않는다. 기존의 서부극이라면 등장과 동시에 총을 맞고 죽을 법한 인물인 것이다.


둘의 만남도 기존 웨스턴 문법과 호응되지 않는다. 하긴 동성 간의 만남 자체가 웨스턴 문법에 맞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둘은 총을 통한 대화는커녕 주먹조차 섞지 않는다. 러시아 깡패에게 쫓기는 킹루를 발견한 쿠키는 옷과 음식과 잠잘 곳을 선뜻 건넨다. 후에 우연히 재회한 둘. 이번에는 킹루가 쿠키에게 음식과 잠잘 곳을 선물한다. 살해가 아니라 사례(謝禮)가 둘 간의 질서이다.



한편, 마을의 권력자인 팩터 대장은 영국에서 먹었던 밀크티 맛이 그리워 타지에서 소를 공수해온다. 우유를 얻으려는 것이다. 먼 여행길의 피로로 인해 수놈은 죽어버렸고 암소만이 마을에 도착한다. 기성의 인물이든 그간 조명받지 못했던 인물이든 간에 돈이 필요하다.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는 둘은, 팩터 대장의 소에서 몰래 우유를 짜내 쿠키를 만들기로 한다. 우유 반죽 쿠키를 맛보지 못한 마을 사람들은 둘이 만든 과자에 열광하고, 팩터 대장까지 이 쿠키를 맛본다. 사건은 이런 식으로 확장된다.


“새에게는 둥지, 거미에게는 거미줄, 인간에게는 우정.” 영화에서 거대한 선박보다 먼저 나오는 인용구이자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이다. 4:3 화면비는 둘의 우정이라는 과자를 담아내는 데 가장 적합한 그릇이다. 가로로 넓은 1.85:1의 화면에 비해서, 정사각형에 가까운 4:3의 비율로 두 인물을 담기 위해선, 둘이 붙어 있어야 한다. 서로 마주 본 채 총을 겨누는 두 사내를 다루려면 1.85:1 혹은 2.35:1이 좋겠지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친구를 다루려면 4:3이 좋은 것이다.


감독은 화면비뿐만 아니라 인물의 배치로도 우정을 연출한다. 좁은 화면비로 두 인물은 가깝게 밀착하거나 혹은 대각선의 앞뒤로 배치된다. 한 인물이 좌/우측 앞에 있고, 다른 인물이 반대쪽 뒤에 있는 식이다. 이러한 인물 배치는 화면에 깊이를 부여하고, 이는 그간 영화에서 부정적으로 다루어졌던 높이―킹루가 망을 보다가 떨어진 나무, 모든 문제의 발단인 돈 주머니를 숨겨놨던 또 다른 나무, 둘이 도망갈 때 쿠키가 차마 뛰어내릴 수 없었던 높은 절벽―와 대비가 된다. 영화에서 높이는 위태롭고 깊이는 아늑하다. 둘의 차이는 땅에 발을 딛고 있을 수 있느냐의 여부이다. 감독에 의하면, 이불 밖만 위험한 게 아니라, 대지를 떠나는 것도 위험하다.


간신히 도망친 후 기어코 재회한 둘은 잠시 숲에 누워 쉬기로 한다. 영화는 그대로 끝이 나지만 관객은 영화의 프롤로그를 보았다. 둘은 백골이 될 때까지 200년 이상 잠잘 것이다. 땅에 뿌리내린 채. 영화는 죽음을 비극으로 다루지 않고 안식으로 다룬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죽음이라면 괜찮다는 듯이. 마음을 놓을 수 없어 위험한 아찔함보다는 몸과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안정감이 낫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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