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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Dec 19. 2021

어른의 모양

<파워 오브 도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그때  얘기를 해야 했는데. 우리  일진에게  짓은 하지 말라고 해야 했는데. 교수에게  과제를 어떻게 일주일 만에 끝내냐고 져야 했는데.  대리에게 지난달에 내가  성과를 보라고 쳐야 했는데. 그때  얘기를 해야 했는데.


꺼내지 못한 말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려 누군가는 밥통을 껴안고 비빔밥을 퍼 먹는다. 혹자는 술잔을 쥐어 잡고 소맥을 목구멍에 퍼 붓는다. 노병만 죽지 않는 게 아니다. 공격성도 죽지 않는다. 심지어 공격성은 사라지지도 않는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공격성은 사라지지 않고, 안으로 향한다.


어떤 후회는 드러내지 못한 말, 하지 못했던 행동의 역류이다. 어떤 자기 비하는 도전 대상을 넘어서지 못한 데서 오는 반작용이다. 어떤 자살 충동은 적을 벌하는 데 실패한 이가 겪는 뒤집어진 처벌욕구다. 표출되지 않은 공격성은 전도된다. 밖을 향하지 못한 공격성은 안을 향하게 된다.


필(베너딕트 컴버배치)과 조지(제시 플리먼스)는 형제이자 대규모의 농장을 운영하는 거부이다. 필은 마초적인 인물이다. 담배를 꼬나 물고, 동료와 음담패설을 나누고, 연거푸 술을 마시고, 약해보이는 이를 보면 조롱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이다. 반면 동생인 조지는 온건하다. 형제는 농장에서 일하는 십여 명의 직원과 함께 식당에 간다. 레스토랑의 주인이자 과부인 로즈(키얼스틴 던스트)는 요리를 만들고, 그녀의 아들이자 곱상한 외모와 마른 체구의 소유자, 피터(코디 스밋 맷피)가 서빙을 한다.


테이블 위, 종이로 만든 조화를 본 필. 감수성을 지닌 남자였던 걸까. 하긴 이전 장면에서 필은 거친 외향과 어울리지 않게 벤조를 치기도 했다. 필은 이러한 기대를 비웃는다. 피터가 자신이 만든 꽃이라고 말하자, 필은 꽃에 불을 붙여 담뱃불로 사용한다. 사내놈이 이따위 것이나 만드냐는 듯이. 필의 야유에 피터는 상처받고, 이를 알게 된 엄마 로즈는 오열한다.


조지는 로즈를 위로하고, 위로는 사랑으로, 사랑은 결혼으로 이어진다. 동생의 결혼 소식에 필은 분노한다. 그는 동생에게 네 얼굴을 보라고, 대학 갈 머리도 안 되는 뚱땡이인 너와 왜 함께 살겠냐고, 돈보고 결혼하는 거 아니겠냐고 소리치지만 조지의 사랑은 굳건하다. 결국 로즈와 피터는 조지와 함께  산다. 그리고 필과도 함께 살게 된다.  


이후 피터는 죽은 아버지의 유지를 좇아 의대에 들어가고, 로즈는 필의 압박을 피해 알코올로 도망간다.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온 피터. 이때 피터는 새하얀 운동화를 새로 사 신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터는 무언가를 알게 된다. 필의 비밀 장소에 남성 누드 사진이 가득했다는 사실이다. 이쯤에서 관객 역시 무언가를 알게 된다. 필이 최고의 친구이자 사나이였다고 말했던 브롱코 헨리, 오래 전에 사망했다는 그의 이니셜이 새겨진 손수건을 가지고 필이 자위한다는 사실을.


필은 드러내지 못한 자기 정체성의 역류로 고통 받는 인물이었다. 브롱코 헨리와의 사랑, 동성애자라는 자기 본연의 모습을 표출하는 데 실패한 그는, 자기실현의 뒤집어진 상태, 즉 극심한 자기 비하와 자기 학대에 시달린다. 그의 공격성은 여린 내면을 감추던 위장이었고, 그의 비(非)-위생은 순결한 마음을 불결하게 하려는 처벌 욕구였다. 결국 세상의 편견을 넘어서지 못한 그는 자기 자신을 거꾸러뜨리려 한다.


몇 개월 만에 필과 카우보이들의 성정이 바뀌었을리 없다. 여전히 그들에게 피터는 좋은 놀림감 또는 테러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피터는 의연하다. 숱한 조롱에도 굴하지 않는 피터를 보고 필은 마음을 연다. 25년째 세상이 두려워 자신을 벌한 필이 25살도 되지 않았지만 당당히 세계에 맞서는 피터에게 끌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필은 피터에게 밧줄 만드는 법을, 말 타는 법을, 사나이가 되는 법을 알려준다. 그리고 카우보이 부츠를 신으라 조언한다.


이때 피터는 밧줄을 앞뒤로 매만지는데 이는 마치 남근을 애무하는 행동처럼 보인다. 필은 자신의 우상이자 몇 번을 반복해서 말했던 브롱코 헨리의 일화를 피터에게 들려준다. 브롱코는 자신에게 농장 뒤의 산맥에서 개의 형상을 보는 방법을,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알려줬던 진짜 남자였단 것이다. 하긴 브롱코는 필에게 사랑에는 성별의 구별이 필요 없다는 것을, 그 시대의 다른 이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알려줬던 남자였다. 그런데 피터는 처음부터 자신은 산에서 개의 형상을 봤다고 답한다. 필은 놀란 채 피터를 응시한다.


같이 캠핑까지 간 필과 피터. 필은 브롱코의 이야기를 하며 어른이 된다는 건 불행을 견디는 것이라 말한다. 필에게 성인의 모양은 카우보이 부츠와 유사하다. 자신을 감추고, 자신을 감싸서 진흙이 묻지 않게 하는 것이다. (진흙, 즉 세상 또는 세상의 풍파를 피하기만 했던 필은 비밀 장소에서 알몸 상태인 자기 몸에 진흙을 바르기도 한다. 이렇게라도 세상과의 접점을 찾겠다는 듯이.) 반면 피터는 죽은 아버지가 말해준 어른의 모습을 말한다. 그에게 성인을 향한 과정이란 장애물을 없애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장애물을 없애면 무엇이 드러날까? 자신이 드러난다. 새하얀 운동화가 드러난다. 피터의 새하얀 운동화가 빛난다.


자신을 감추는 데 집중해서일까. 필은 사태를 잘못 보곤 한다. 둘의 캠핑에서 돌연 토끼가 나무 장작 아래로 숨는데, 필은 토끼가 용감하다고 말한다. 나무를 거두니 토끼는 상처 입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토끼는 용감하게 나무 장작으로 돌진한 게 아니라, 무서워서 장작 아래로 몸을 감춘 거였다. 용감히 세상에 맞선 게 아니라, 동성애자임이 밝혀질까 무서워 숨어버린 필처럼. 토끼를 편안하게 해주라는 필의 말에 피터는 토끼를 안심시킨 후 목을 꺾는다. 장애물을 제거하면 사태를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일까. 피터는 그러한 순간에도 사태를 정확히 파악한다. 필의 손목에 상처가 있다는 걸 피터는 놓치지 않는다.


캠핑 다녀온 필은 격분한다. 자신이 아껴둔 가죽, 그 누구에게도 팔지 않고. 극히 일부는 밧줄을 만드는 데 쓰고, 대부분은 불태우는데 쓰는 가죽을 로즈가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자기 파괴적 성격은 가죽의 사용법에서도 드러난다.) 한편 술독에 빠졌던 로즈는 이제서야 숨통이 트인다. 가죽을 찾아 헤매던 인디언/토착미국인들에게 무상으로 가죽을 제공하는 행동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느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인디언이 답례로 준 가죽의 온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감독은 토끼를 통해 필의 운명을 예고했다. 의대생 피터는 이미 죽은 동물의 시체에서 탄저균을 확보해놓은 상태다. 처음엔 그 행동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불분명했지만, 이제 관객은 안다. 피터의 행동은 필이라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함이었음을. 결국 피터는 성공한다. 탄저균이 필의 상처에 숨어 들었을 거고, 필은 세상에서 완전히 숨게 될 거다. 세상을 피해서 숨으려던 필 역시 성공한 걸까. 그는 관 속에 자기를 감추게 되었다, 영원히.


피터는 필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밧줄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침대 아래로 밧줄을 내려놓는다. 이제 자신과는 상관없는 물건이라는 듯이. 그리고 장례식에서 낭송되는 성경의 시편을 읽는다.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시편 22:20) 시편이 피터를 웅변한다. 자기 자신이란 유일한 것을 세상의 편견이란 개의 세력에서 구한 이가 바로 피터니까.


누군가 ‘치밀하다’라는 형용사의 용례는 무언가요, 라고 묻는다면 “<파워 오브 도그>가 치밀합니다”라 답해도 된다. 베너딕트 컴버배치는 최고작을 찾았다고 자부하지 않을까. 그는 폭력적인 마초와 상처 입은 어린 아이라는 동전의 양면을 표현하는데 성공했다. 키얼스틴 던스트는 노화를 감추지 않은 채 위축된 여성의 모습을 표출한다. 몽환적인 눈빛 속에서 이따금씩 강함을 내비치는 코디 스밋 맷피도 언급되어야 한다. 동생 조지 역의 제시 플리먼스는 사실 기능적인 캐릭터로 소비되었지만,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을 연상시키는 탓인지 어떤 다른 이유에선진 몰라도 기억에 남는다. <파워 오브 도그>는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퍼스트 카우>와 함께 새로운 웨스턴의 프론티어로 자리할 것이다.


덧붙임.

언제부턴가 영어로 제작된 영화의 제목은 영어 음차로 정해지는 경우가 많다.

영어 음차가 무조건 나쁜 건 아니다. 가령, ‘미투’ 같은 경우, 홍준표는 ‘나도 당했다’라 부르자 제안했지만 이는 말하는 사람의 불편함을 전혀 고려치 않은 발상이다. 우리말로 표현했을 때보다 영어로 말할 때, 말하는 이의 충격이 경감되는 측면이 있기에 ‘미투’는 괜찮은 음차이다.

단, ‘the power of the dog’의 경우에는 물음표가 붙는다. 영어로 말했을 때의 이점도 없고, 영어로 말해야만 하는 상황도 아니다. ‘개의 세력’ 또는 ‘악의 세력’이란 유명한 영화가 이미 존재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뜻을 알기도 어렵다. 영어 문법을 망치면서까지 음차를 고집하는 건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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