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을리 소향 '숲속의 술단지'
술의 순기능을 알고 술을 잘 드시지 못하는 부모님께 드리고 싶어서 우리술을 빚기 시작했습니다.
이 한 문장이었다. 내가 어흘리에 가야겠다고 다짐한 이유는. 어쩌면 그동안 내가 술을 잘 몰라서 멀리했던게 아닐까, 나에게 술은 늘 부정적이었으니까 알아갈 기회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결정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술을 좋아해서 함께 즐기고 싶었다. 그렇게 숲을 좋아하는 애랑 술을 좋아하는 애가 강릉 어흘리 소향으로 떠났다.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맞아준 소연, 은수님과 건강한 채식 식단의 점심을 먹고 숲으로 향했다. 술을 빚기 전 몸과 마음에 자연의 향과 에너지를 담아오기 위함이라고 했다. 한 시간동안 대관령 소나무 숲에서 깨끗한 숨을 내쉬고 마셨다. 한껏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돌아와 바로 술을 빚기 시작했다.
기다림의 연속이죠
수련하듯이 편안하게 하세요
술을 빚기 위해 쌀을 씻고, 누룩을 빻고, 밥을 짓고, 식히고, 이 모든 것을 섞어내어 담는 과정은 모두 짧지 않은 기다림이 필요했다.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햇빛을 쐬고 무지개를 보고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시간이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실패한 술이라는 건 없어요
맛이 바로 안나와도 의미가 있고
맛이 나는 때가 다 있거든요
완성된 술이 생각했던 맛이 나지 않아도 숙성시킨 뒤 식초로 쓰일 수 있고, 시간에 따라 맛이 계속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술을 빚는 과정에서 '실패'는 없다고 했다. 소연님의 말을 듣고 나니 서울에 두고 온 해야할 일들을 더 편안하게 즐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반나절을 보내고 강릉에서 자란 쌀, 누룩, 물로 빚은 자연 숙성 발효 전통주가 모양을 갖추었다. (완성되었다고 하기에는 아직 3주의 시간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소향에서 머무르는 동안 내가 먹고 보고 들은 것이 모두 자연스러웠다. 억지로 꾸미지 않아 어색한데가 없는 뜻의 그 자연스러움 뿐만 아니라 자연 그 자체에서 우러나와 보기좋게 다듬어지지 않은 것들 말이다. 속이 편안했다. 나쁜 꿈을 꾸지 않고 푹 잤다. 새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얼마 전 추천받은 <사생활의 천재들>책을 폈는데 공교롭게도 첫 시작이 박수용 다큐멘터리 감독님의 '자연'에 관한 글이었다.
자연은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대답하라 합니다. 자연은 나를 갈등하게 합니다. 자연은 나에게 불확실한 것, 미묘한 것에서 길을 찾으라 합니다.
내겐 꽃 이름을 아는 것보다 어디선가 꽃이 피고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는 걸 느껴야 합니다. 낙엽 하나가 떨어져도 낙엽이 떨어지는 걸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릴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마치 시장의 일만 큰 도움이 되는 것처럼, 마치 시장의 일만 있는 것처럼 돌아가고 있지만 사실 자연의 일도 있단 걸 말입니다.
그저 술을 빚어보는 체험을 하러 왔는데 자연을 발견하고 자연 속에서 답을 찾는 귀한 경험을 했다.
기다림의 연속.
정성껏 빚은 술의 발효를 기다리며 어흘리의 자연스러움을 떠올린다.
실패가 없는 술.
나는 이제 시장의 일로 지칠 때마다 마실 수 있는 나만의 술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