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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씨 Apr 13. 2020

아빠의 사생활

에세이 드라이브 5기 <학원>


그의 책상에서 처음 토익 교재를 봤을 때가 생각난다. 취준생도 아니고 퇴준생도 아닌 그에게 도대체 이 두꺼운 책들이 왜 필요한 걸까. 딸내미에게 빨리 취직하라는 압박을 새로운 방법으로 주려는 걸까. 오, 신박한데? 혼자 책상 앞에 서서 이상한 결론을 내릴 때쯤 어깨너머로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아빠가 800점 넘는 데 2년이나 걸렸다는 거 아니냐..” 그의 들뜬 목소리를 듣고서야 알았다. 세상에, 아빠는 토익 공부에 진심이었어. (2013)

 

그의 사생활을 아빠를 뺀 모든 가족이 자랑스러워하고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쑥스러운지 먼저 티를 내지 않았다. 엄마한테 쓱 가서 아빠가 시험을 보는 목적이 무엇이냐, 이직을 하려는 것이냐 조심스럽게 묻자 “아빠는 그냥 머물러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거야, 시험도 보고 공부도 하면서 아빠 나름대로 성장을 느끼고 싶은가 봐.” 대답했다.


어리석은 딸아. 아빠의 무한한 배움을 목적이라는 단어에 가두려고 하다니. 그렇게 몇 년 동안 아빠는 격 달로 한 번씩 비장하게 책상에 앉아 문제를 풀었고, 현재 60대의 그는 취업한 딸보다 더 높은 시험 성적을 보유하고 있다.

 

토익 시험을 끝으로 그의 사생활이 마무리 되나 싶었는데, 놀랍게도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2017) 하루는 아빠가 핸드폰을 바꿨다면서 쓱 내미는데 희한한 케이스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노트 모양의 폰케이스인가? 자세히 보니 날렵한 글씨가 쓰여있다. ‘내부 감사 직무란 한 조직의 업무 수행의…’ 뭐야 아빠 글씨잖아!


어두운 버스 안에서 끄적인 기출문제

“아빠도 이제 늙었어 외우는 게 전같지가 않어~ 하도 안 외워져서 기출문제라도 적어봤다! 거기에 써놓으면 조금이라도 외워지겠지.”


알고 보니, 아빠는 원하는 직무의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서울로 학원에 다닌 지 두 달째라고 했다. 금요일에 일찍 퇴근하고 저녁 수업을 들은 뒤, 새벽 버스를 타고 다시 대전에 내려오는. 그 자격증은 공부하는 사람이 많이 없어서 서울에 가야만 학원에서 배울 수 있다고. “2시간밖에 안 걸리는데 뭐” 대수롭지 않게 얘기를 끝낸다.


마음 한구석이 아프게 뜨거워진다. 서울로 향하는 캄캄한 버스 안에서 기출문제를 적고 있는 아빠를, 배우는 즐거움 하나로 왕복 4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아빠를 보며 “이야 다 외웠어? 내가 테스트해줄게.”라는 말 빼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아빠가 좋아하는 배움을 잠시 멈춰야 하는 때가 와버렸다. (2019) “아빠가 많이 아파.” 엄마의 고백으로 시작한 아빠의 투병 생활은 겨울부터 봄까지 이어졌다. 마침내 마지막 수술이 끝나고 이제는 안심해도 된다는 교수님의 말을 들은 다음 날, 아빠는 할 말이 있다며 엄마, 나, 동생 모두를 한자리에 불렀다.  

 

“대학원에 가려고 해.” (2020) 건강검진을 통해 암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확실한 진단이 나오기까지, 그는 일주일 동안 지옥 속에서 살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지옥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인 경영대학원 진학을 생각해냈다고. “암 선고받고 삼 개월 동안 몰래 시험 준비했었어. 그리고 저번 주에 발표가 났는데 합격이라네.” 또 한 번 몸이 뜨거워졌다. 동생이 먼저 크게 박수를 쳤다.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아빠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심장이 뜨거워졌다.

 

“이거 다운받으면 되는 거냐?” 그로부터 삼 개월 뒤, 나는 그의 첫 싸강을 도와주고 있다. 가만 보니 교수님도 자기 동년배 같다고, 그분도 분명 인터넷 강의는 처음 해볼 것이라며 장난스럽게 웃는 아빠. 그의 책상을 보니 여전히 두꺼운 책들이 가득 올려져 있다. 아무래도 다음 아빠 생일엔 근사한 독서대를 선물해야겠다.


글감 : 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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