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재' 작가님의 에세이 스탠드 <00의 커피>
1. 봄의 커피
“너는 8년 동안 연애하면서 실망한 적 없었어?”
한 사람을 지속적으로 알아가는 시간이 두려울 때가 있다. 보고 싶지 않았던 모습이 한순간 튀어나올까 봐, 그래서 마음의 균형에 금이 생기기 시작할까 봐. 따뜻한 머그잔에 손을 얹고 있던 보미가 툭 대답을 던진다.
“어떤 사람이든 알아갈수록 실망할 수밖에 없지 않나? 시간이 흐를수록 변할 수밖에 없는 거고.. 근데 난 그 변한 것도 좋던데? 그래서 실망해서 더 좋았어.”
무심코 고개를 끄덕거리다 마지막 말에 얼음을 휘젓고 있던 손을 멈췄다. 아, 명쾌하다. 변하지 않는 것들에 흔들리지 않으면 변한 것들도 자연스럽게 안아줄 수 있는 건데. 대단한 말을 던져 놓고 아무렇지 않게 다음 대화를 이어가는 보미를 가만히 쳐다본다.
단단한 친구가 옆에 있으면 없던 용기도 차오르는 법, 이제 봄이다!
2. 여름의 커피
영상으로 관심을 너머 수치를 보여줘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수치가 높은 영상들을 보면 스스로 작아진다. 윤리적이지 않지만 자극적인 소재로 100만 뷰를 넘긴 영상을 보며, 그것을 만든 사람이
나를 그렇게도 괴롭히던 인성 파탄자 선배였던 것을 알고 현타가 세게 왔다. 분하다. 내 편을 만나자. 차가운 것을 먹자. 식히자.
“있잖아 어쩌면 나같이 싱겁고 심심한 사람들은 창작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조금은 별난 구석이 있어야만 대단한 걸 만들 수 있는 거 아니ㄹ..”
진동벨이 울리고 희주가 일어난다. 카페에서 제일 큰 유리잔 2개가 탁 탁 놓인다.
“아니야.”
큰 유리잔 너머 희주가 단호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말한다.
“어차피 일이잖아. 인생이 아니고.”
3. 가을의 커피
“날씨가 쌀쌀해지면 개편이 오고 있다는 뜻이에요”
TV 속에서 호들갑을 떠는 방송인들을 보며 ‘뭐 저렇게 오버지’ 싶었던 나. (를 반성한다.) 그 쌀쌀한 날씨는 우리 회사에도 발을 들였고 덕분에 지옥의 회의실에서 며칠째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참 뇌가 아무생각없을 무를 향하고 있을 즈음, 같이 일했던 동료들이 회사를 찾아왔다.
인물 모드 사진을 찍어야 할 것만 같은 딸기두유라떼 세잔 앞에서 내가 먼저 한숨을 쉬었다. 아니 두 사람이 동시에 쉬었다. ‘뭐지 눈치게임인가’ 소리가 난 곳을 쳐다봤다.
“전 지금 방황 중인 것 같아요” 삼십살 J님이 말했다.
“헐 저도 계속 방황 중이잖아요!! 아 근데 저희 아빠도 요즘 방황 중이 신 것 같던데.. 오십살이세요” 이십오살 E님이 말했다.
이십구살 다솜이는 조금은 편해진 한숨을 내쉬며 작고 귀여운 딸기두유라떼를 마신다.
4. 겨울의 커피
‘솔직히 일 년에 한번은 봐야 되지 않냐’ ‘모여모여 투표하자’라는 문장들이 왁자지껄 나오는 계절, 연말이다. 간만에 완전체가 모여 술잔을 부딪치다 꼭 커피를 마셔야겠다는 한 친구의 주사 덕분에 2차로 카페의 큰 테이블을 우르르 차지했다.
“얘는 내가 교육 좀 시켜야겠어 예뻐서 봐줬더니 자꾸 기어오르잖아 전화도 일부러 좀 안받아야 정신차려. 아오 버릇을 잘못 들였지 내가”
나이가 가장 많다는 이유로 대외활동 회장이 되었었던 오빠가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보며 말한다. 그렇다. 각자의 환경에서 364일을 지내다 같은 공간에 모이게 되면 분위기가 싸해지는 순간들이 온다. 그래도 대학생 때는 ‘아유 저런 사람도 있네 껄껄’ 웃으며 지나갔었는데. 아직도 시대에 뒤처지는 말을, 그것도 자신 있게 하는 것을 보니 안 되겠다 싶어 굳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오빠가 교육을 좀 받아야겠는데 ㅎ그리고 굳이 그걸 왜 우리 앞에서 과시하듯이 말하는 거야?”
분위기가 또 한 번 싸해진다. 그리고 친구들의 시선은 오빠가 아닌 나를 향한다.
“아유 다솜아 하하 화장실 갈 때 안 됐어? 뭘 예민하게 또..”
뭔가 상당히 잘못된 것 같지만 이 상황에서 불편한 사람은 무례한 말을 당당하게 내뱉는 사람이 아니라, 솔직하게 잘못된 점을 짚어주는 사람이다. 서글서글한 친구들이 분위기를 살려 3차 가는 모습을 뒤로하고 새벽 12시 9분, 텅 빈 신도림 행 열차에 앉아 메모장을 켰다.
메모 13.
내가 솔직해지는 순간 나는 불편한 사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