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내가 찾아내야 할 나의 리틀 포레스트
정말 오랜만에 꼭 봐야겠는 영화가 생겼다. JTBC 뉴스룸에 출연한 배우 김태리와 손석희 앵커의 인터뷰. 예측할 수 없는 대답들에 오히려 손석희 앵커가 당황하는 모습이 재미있었고 김태리라는 배우가 인상 깊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매력 있었다 엄청. 일본 원작영화 리틀포레스트_여름과 가을, 리틀포레스트_겨울과 봄 두 편을 VOD로 예습하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김태리, 류준열, 진기주, 문소리_ 출연하는 배우들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면 꼭 봐야겠는 영화다.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서울에서만 살았으니 사전적 의미의 내 고향은 country가 아닌 city겠지만. 아빠의 고향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엄마의 고향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기억도 안나는 어린 시절부터 대학생이 된 후로도 부모님과 함께 찾아갔던 그 곳들이 감정적 의미의 진짜 내 고향이다.
아빠의 고향이 내 고향인 이유. 설 명절에 눈이 많이 오면 넓게 펼쳐진 빈 논은 고요하게 덮이고 추석 명절 즈음의 지평선을 넘어가는 석양은 도시의 그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때때로 금강 하구둑 근처의 철새 떼가 내 머리 위를 떼지어 지나가면 돈 주고도 못 볼 풍경을 마주할 수 있었고 낫이 그대로 걸려있는 할아버지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보는 게 좋았다. 아빠가 어린시절 썰매를 타고 놀았다는 할아버지 댁 뒷동산의 키 큰 소나무들은 내 어린 시절 역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엄마의 고향이 내 고향인 이유.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_ 서울에 다녀가시는 할아버지를 따라 버스를 타고 외갓집에 내려갔다. 한 여름 뙤약볕 아래 한 달 넘게 시골 외갓집에서 지낸 나는 다시 만난 엄마가 깜짝 놀랄 정도로 새카매져서 서울로 돌아왔다. 사촌 언니, 육촌 언니들과 산으로 들로 열심히도 쏘다녔다. 손으로 덥석덥석 매미를 잡기도 하고, 아직 익지도 않은 호두며 밤 열매를 따다가 괜히 들쑤셔보기도 하고, 그때만 해도 물이 참 맑았던 개울에서 놀다가 종아리에 붙은 거머리를 뒤늦게 발견하고 엉엉 울기도 했다. 밤이 되면 할아버지는 마당에 모깃불을 피워주셨고 나는 평상에 누워 할머니가 주시는 수박이며 포도며 복숭아를 신나게 받아먹었다. 20년도 더 지난 기억인데 그 때 내 눈으로 쏟아지던 밤하늘은 아직도 사진처럼 영상처럼 기억 속에 생생하다.
그 때는 잘 몰랐는데 이제 와서 보니 유년시절의 저 모든 경험들은 축복이었다. 내 또래 대부분 나와 같은 경험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내 기준에서의 착각이었다.
일본판 리틀 포레스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
"유우타, 넌 왜 코모리로 돌아왔어?"
"도시 사람들은 코모리랑 말하는 게 달라. 사투리를 얘기하는 게 아니야. 자신이 몸으로 직접 체험해서 그 과정에서 느끼고 생각하며 배운 것. 자신이 진짜 말할 수 있는 건 그런 거잖아. 그런 걸 많이 가진 사람을 존경하고 믿어.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주제에 뭐든 아는 체하고 남이 만든 걸 옮기기만 하는 놈일수록 잘난 척해. 천박한 인간이 하는 멍청한 말 듣는 데 질렸어. 난 말야, 남이 자길 죽이는 걸 알면서도 내버려두는 그런 인생을 살고 싶진 않았어. 여기를 나가서 처음으로 코모리 사람들을, 우리 부모님을 존경하게 되었어. 참 말을 할 수 있는 삶을 사셨구나 하고."
'유우타는 자기 인생을 마주하려고 돌아온 것 같다.'
도시의 삶은 공허하다. 내가 아닌 나로 살아야 하는 시간이 너무 길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내가 되고 싶지 않은 나로 살아야 하는 시간이 너무 길다. 구두보다는 운동화가 좋은데 7일 중에 5일은 구두를 신어야 한다. 게다가 지금의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자꾸 생겨나는 것 같다. 아니 사실은 내가 그 이유들을 자꾸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다.
애초에 속도에는 별 관심 없었다. 결국은 방향인데 언제든 마음먹으면 틀어버릴 수 있으니 아직은 조금 더 버텨보자는 마음인 건지 아니면 이미 확신은 서있으면서도 단지 실행을 못하고 있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고민이 길어져봤자 좋을 건 없는데. 어쩌면 지켜야 할 게 더 많아지기 전에 지금 결정해야 할지도 모를 일인데.
남은 인생이 길다면 그 긴 인생 중에 1-2년 정도 멈춰있어 보는 건 지나고 보면 별 일 아닐 테고, 남은 인생이 짧다면 더욱이 당장의 1-2년은 무엇보다 소중한 시간인데. 나는 왜 자꾸만 내 인생의 리틀 포레스트를 우선순위 저 뒤로 미뤄두는 건지. 대체 뭐가 문제인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