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_ 하늘과 바람과 별과 오름
제주 동쪽 해안을 도는 701번 버스를 타고나니 눈에 익은 길들이 지나가고,
저 멀리 돌아가는 풍력발전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기분 좋게 잠이 솔솔 온다.
버스정류장에 내려 게스트 하우스로 걸어가는데,
길가에서 무언가 하시던 할머니가 나를 보시더니 방긋_ 웃으신다.
당근 작업하러 갔다 왔더니 길가에 내놓았던 말린 참깨가 다 떨어졌다며 방긋_ 웃으신다.
"당근이요? 당근을 벌써 뽑아요 할머니?"
"응, 양 옆에만 두고 가운데는 뽑아줘야지, 서울?"
"네, 서울에서 왔어요"
"우리 손녀도 부산에 있는데, 서른 살"
"아... 네! 저도 서른 살이에요"
서울에서 왔냐고 물어보신 건지, 나이가 서른이냐고 물어보신 건지 살짝 헷갈려졌다.
'아, 나 이제 겉으로 보기에도 서른 살로 보이는가봉가 (흙)'
그래도 손녀딸 생각이나서 말 붙여주신 할머니와의 짧은 대화에 마음이 훈훈해졌다.
(분명 제주 방언으로 말씀하셨는데, 내 머릿속에는 해석된 버전밖에 안 남았다, 아쉽다.)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했다.
뭔가 범상치 않음과 심상치 않은 장난기를 가득 풍기는 사장님의 안내를 받아 일단 내 방으로 올라갔다.
독립성이 보장되는 1인실_ 침대에만 앉아있어도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완벽하다.
"저녁은 드시고 오셨어요?"
"네, 먹고 왔어요 (사실 안 먹었지만)"
"별빛투어는 8시에 출발해요, 8시까지 1층으로 내려오시면 돼요"
"아, 네 감사합니다"
(설레는 마음에) 혹시라도 선착순이면 자리가 없을까봐 20분이나 일찍 내려갔다.
1층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잠깐 기다리다가 다른 게스트들과 함께 차를 타고 출발.
"용눈이 갈까요, 아끈다랑쉬 갈까요?"
"그런 거 물어보지 말고 사장님이 알아서 데려가, 딱 봐도 여기 다들 결정장애야"
"나 오늘은 아끈다랑쉬 가고 싶은데, 용눈이가 높아서 별은 더 잘 보일 텐데..."
"아, 그럼 용눈이 가야지"
게스트 중 사장님과 친분이 있는 듯한 언니가 재미지게 대화를 이끈다.
나 같은 버스 여행자에게는 교통편이 만만치 않아서 (혼자 가기 살짝 무섭기도 해서)
항상 주저했던 오름인데 차로 오니까 금방이다.
"올라가는 길에 후레쉬 안 켤게요. 우리가 불 켜면 반딧불이들이 똥꼬에 불을 안 켜요"
어둠에 눈을 적응시키고 나니 생각보다 올라갈 만 하다. 중간중간 반딧불이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아니, 사실은 똥꼬에 불을 켰다 껐다 하는 거겠지. 나를 포함한 게스트들 모두 탄성을 지른다.
"왜들이래 반딧불 처음 본 사람들처럼"
"처음 봤어요!!!"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에 가봤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오고 싶어 하는 오름_
제주 중산간 오름 중 가장 핫한 오름_ 용눈이.
용눈이 오름 하나를 담아도 평생 다 못 본다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찾는 이 없던 곳에 이제 낮에도 모자라 밤에도 사람들이 오른다.
용눈이 오름 정상에 올라서니, 별빛 보다 훨씬 더 밝은 빛들이 한 가득 쏟아진다.
집어등을 켜고 조업 중인 배들이 해안에 가득하다.
"우와, 오늘 한치배 진짜- 많이 떴네, 저어기 네모난 실루엣으로 보이는 게 성산일출봉,
그 옆에 방금 깜빡거린 저 불빛이 우도 등대예요"
사방의 어둠과 눈부신 대조를 이루는 해안가를 따라 성산일출봉이, 우도가 그려진다.
덕분에 별은 생각보다 잘 안 보이지만,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대로
오름 정상에서만 마주할 수 있는 이 바람만으로도 충분하다.
잠깐의 자유시간을 갖고 내려가는 길, 아까는 못 본 것 같은 무덤 하나를 지난다.
다른 곳에서도 몇 번 봤지만 제주 무덤에는 주변에 돌담이 둘러져있다.
"이 무덤 주인은 부자네"
"왜요? 높은 곳에 있으면 부자예요?"
"아니요, 돌담이 높고 클수록 부자예요"
한라산을 마주하고 제주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이 곳을 영원한 안식처로 삼았으니,
이 무덤 주인은 부자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