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_ 초록 앞에 하늘과 구름 아래 바람 가운데
늦은 점심을 먹고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와 방에서 잠깐 쉬고있는데 전화가 온다.
모르는 번호라 받을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전화가 끊어지더니 밖에서 누가 나를 부른다.
창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보니,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이다.
"오름 갈 건데 같이 갈래요?"
"네, 그럼요! 지금 내려갈게요!!"
게스트 하우스 즉흥여행_ 이것은 나의 시간과 사장님의 시간과 날씨와 기타 등등의 여건이
맞아떨어져야 가능한 게스트하우스의 50가지 매력 중 하나다.
1층 카페 사장님과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과 나_ 이렇게 셋이서 카페 사장님 차를 타고 나섰다.
출발할 때만 해도 우리의 목적지는 아부 오름이었다. 여길 다녀오면 앞으로 직장 생활을 잘 할 수 있다며,
내 직장 생활을 응원하는 두 사장님의 곱디 고운 마음으로 선택한 오름이다.
애초에 운전면허가 없는 비기능인으로서 나는 버스 여행 예찬론자이지만,
자동차를 타고 제주 도로를 달리는 것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
차를 타고 지나는 길에 당근밭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 저게 당근밭 맞죠?"
"음... 그럴걸요? 왜요?"
"아니, 재작년 겨울에 왔었는데 당근밭 보고 진짜 깜짝 놀랐거든요 너무 예뻐서......
그 후로 주변 사람들한테 제주도 내려가서 당근 농사짓고 싶다고 그러고 있어요"
"음, 뭔가 어울리네요. 유나씨 이미지가 토끼랑 비슷해요. 당근 박스에 본인 사진 붙여서 팔면 되겠네,
이왕이면 토끼 머리띠라도 하나 쓰고 찍은 사진으로다가"
"어허허허...... (역시 범상치 않으시다)"
도로를 달리다가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이 알려준 지름길로 들어섰는데 뭔가 심상치 않다.
차 안에 앉은 나와 눈높이를 같이하는 수풀을 헤치고 나아간다.
울퉁불퉁한 길을 가다 큰 돌을 밟은 듯 자동차가 크게 한 번 쿵- 하더니 카페 사장님의 단말마-
"으악! 내 차!!"
"어, 여기가 아닌가... 아무래도 차 돌려서 나가는 게 낫겠다..."
"...."
"너... 미워할거야..."
"착하시네요... 미워하기만 하신다니..."
"쟤가 건물주거든요, 조물주보다 높은 건물주...."
"아...." (역시 건물주는 직장인의 장래희망)
다행히 차에 문제가 생기진 않았지만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이 내려 주변을 봐주고서야 겨우 차를 돌렸다.
다시 도로로 나온 시점에 가장 가까운 오름이 백약이 오름이라 우리의 목적지는 급변경되었다.
백가지 약초가 난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오름_ 어느 오름이든 데려가만 준다면 좋으니 상관없다.
게다가 왠지 이름부터 예쁘다. 백약이.
시야에 펼쳐진 초록과 구름과 하늘_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갈수록 얼굴에 와 닿는 바람이 달라진다.
꼭대기에 올라서니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사방의 전경에 비로소 숨이 탁 트인다.
내 공간으로 허락받은 좁은 책상에 앉아 하루 종일 컴퓨터를 마주 봐야 하는 일상과는 전혀 다른,
숨이 트이다 못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전경이 시원하다. 해방감이 든다. 그리고, 울컥했다.
나 혼자였다면 아마, 소리내어 엉엉 울었을지도 모른다.
원하는 게 뭔지, 어떻게 해야 원하는 걸 찾아볼 수 라도 있는지 생각 한 번 안 해보고,
그저 살아내기에만 바빴던 견뎌내기에만 급급했던 5년 남짓한 지난 시간들이 흐릿해진다.
그때 그 초록 앞에, 하늘과 구름 아래, 바람 가운데, 그래서, 하마터면 소리내어 엉엉 울뻔했다.
이 오름을 내려가면 또다시 현실에 발 붙이고 살아갈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렇게, 자꾸만 울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