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직장인이 평일에 강북까지 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 몇 년째 벼르기만 하다가, 연차 찬스로 드디어 다녀왔다. (온지음은 주말에 영업을 안 한다.)
주문은 저녁 코스 + 전통주 페어링.
좋았다. 예상대로 좋았다.
남편의 표현을 빌리면 음식들은 '맛있다'를 넘어 '맛이 뛰어났다'. 온지음의 음식들은 다른 한식 다이닝들에 비해서도 재료 하나하나의 맛이 더 잘 느껴졌다. 간도 당도도 덜한 느낌적 느낌이고. 통상 이런 경우에는 맛이 다소 밍밍해지기 마련인데 결코 그렇지 않았다. 세심한 맛과 식감의 설계를 통해, 재료 본연의 맛으로도 강한 인상의 맛을 냈다.
되새김질 차원에서 음식과 주류 하나하나의 기억을 남겨본다. (내 생각 마음대로 씀 주의)
- 식전주
. 패션후르츠청+직접 담근 영귤소주+토닉+라임
. 상큼 발랄해서 입맛 돋우기의 정수 느낌
- 애피타이저
. 왼쪽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두부 스틱 - 증편에 올린 족편(라임이 좋네 ㅎㅎ) - 참외와 어란과 두부장 - 새우 강정 - 육포
. 기본 제공하는 애피타이저는 보통 모양만이고 밍밍한 경우도 많은데, 맛있었다! 특히 증편에 올린 족편과 육포, 새우 강정!
(1) 증편 위에 족편, 치즈, 파를 올린 메뉴는 딱히 기대를 안 했는데 맛있었다. 족편의 비린맛도 없었고, 잘 다져 올리다 보니 식감도 부담스럽지 않게 떡의 쫄깃함과 잘 어우러졌다. 치즈도 감칠맛을 살릴 정도만 딱 적절하게 꼬릿 했고 파의 향도 맵지 않게 강해서 좋았다.
(2) 새우 강정은, 새우의 감칠맛 있는 짠맛과 단맛의 균형이 딱 좋았다. 짠맛이나 단맛 중 한쪽이 조금만 더 강했어도 이 느낌이 안 났을 것 같다.
(3) 육포: 된장과 육포의 꼬릿함은 정말 꿀 조합이다. 돼지고기를 섞었다더니 약간의 부드러움도 있었고.
(두부 스틱은 딱 생각하는 그 맛이고 참외 어란은 보통이었다. 어란이 이빨에 붙어서 조금 불편 ㅎㅎ)
- 녹두 농마 국수
. 잣기름과 녹두 고명으로 맛을 낸 녹두 녹말 국수였다. 잣이랑 녹두랑 이렇게 어울릴 줄 몰랐다.
잣만 썼으면 여름에 먹기엔 부담스러웠을 것 같은데, 가벼운 느낌의 녹두 고명을 올리니 적당히 부드럽되 너무 느끼하지 않았다.
- 지란지교 막걸리
. 여름에 잘 맞는 막걸리다. 좋아하는 막걸리 중 하나. 양조장 앞에서 딴 무화과 넣어 만들었다는데 그 영향도 있는 것 같다. 막걸리 치고는 조금 가볍고 상큼한 맛도 있다.
- 게살 앵두 편
. 부드럽고 상큼했다. 오이, 생 가지 껍질 깎은 것, 죽순, 앵두 과편을 쌓고 잣소스와 앵두 소스를 곁들였다. 여름 여름 느낌.
. 앵두 소스가 포인트가 되어 잣소스도 부담스럽지 않고 상큼했다.
(난 사실 여기서부터 이미 배가 불러서 위기감을 느꼈다... )
(난 사실 여기서부터 이미 배가 불러서 위기감을 느꼈다... )
- 능이주
. 전복 만두탕과 곁들이라고 나온 능이주. 다음에 나온 전복 만두탕이 굉장히 무겁고 진해서 이 페어링이 심정적으로 이해는 갔는데, 술 자체가 내 취향이 아니었다. 능이향은 삼계탕에 쓰일 때 말고는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데다, 단독으로 마시기엔 산미가 강했다.
- 전복 만두탕
. 서버분의 설명대로 불도장 같았다. 국물이 젤리같이 느껴질 지경으로 묵직했다. 그 와중에도 텁텁하지 않고 맑아서 맛있다기보다 맛이 뛰어나단 말이 어울렸다.
. 전복을 저며 만두피로 쓰고 새우살을 채워 넣은 만두도 세상 고급스러웠고, 소양과 잉어 부레 살짝 말린 것도 고급 감을 더해줬다. 잡내도 없고. 이걸 먹고 힘이 안 날 도리가 없을 듯했다.
온지음에서 구절판의 밀전병 대신 전복 저민 걸 쓴 걸 보고 감탄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만두피로 썼다.
- 서비스 회
. 모든 테이블에 주셨기 때문에 보통 생각하는 그런 서비스는 아니다. 그냥 매일 좋은 재료를 가지고 코스 중간에 변주로 넣는 메뉴를 서비스 메뉴라고 부르나 싶었다.
. 두툼한 농어회, 갈치속젓에 무친 병어회, 대구 알젓에 무친 참치회가 메인으로 나왔고 곁들여 먹을 다시마와 고수 무침, 묵은지, 호박잎이 나왔다.
. 갈치속젓을 잘 못 먹어서 괜찮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좋았다. 기름진 회에 젓갈로 감칠맛과 매운맛을 더하니 연달아 먹기 더 편해진 느낌.
. 오늘 최고의 플레이팅은 호박잎 플레이팅이었다. 호박잎을 겹겹이 쌓으면 먹기 불편하니 슬쩍슬쩍 접어 뒀다. 감칠맛을 더하려고 다진 소고기 찐 것을 중간중간 얹었는데, 그것도 잘 흐르지 않게 신경 써서 접었다. 직접 먹어보면 감탄스러운 플레이팅이었다.
- 삼양춘(탁주)
. 원래도 좋아하는 삼양춘이 회의 페어링 술로 나왔다. 서버분의 설명에 따르면 젓갈과 장맛이 찹쌀로 빚어 달콤한 삼양춘과 잘 어울린다고 했다. 보통 회는 소주나 화이트 와인과 먹는 걸 선호하지만, 젓갈에 무친 회는 맛이 강해서 이렇게 달콤하고 진한 탁주로 조금 눌러주는 것도 좋았다.
- 금태 튀김과 장떡
. 금태는 원체 좋아하는 데다 튀기기까지 했으니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부드러움의 정도가 기대 이상이어서 엄마한테 맡기고 나온 딸내미가 생각나 혼났다. 진심 냅킨에 싸가고 싶었다.
. 하지만 간이 거의 없는 건 나는 조금 아쉬웠다. 나물 장아찌가 함께 나오기는 하지만 그래도.
. 장떡은 원래 쪄서 말려 먹는데, 여긴 서울식 현대식으로 지졌다고 했다. 사실 남은 기름이 많고 눅눅해서 보통이었다. 절대적으로 보면 괜찮았지만 다른 메뉴들이 다 뛰어나서 상대적으로 별로였다.
. 전호나물 장아찌가 나왔는데 전호나물은 처음 먹어봤다. 울릉도에서 제일 먼저 나는 나물인데 바로 수확해서 절였다고 했다. 나물 자체의 향도, 장아찌의 간도 그렇게 강하지 않아 심심한 금태 튀김을 잘 받쳐줬다.
나오자마자 금태 하나는 홀라당 먹어버렸다.
- 상큼한 영귤 소주
. 이건 처음의 칵테일에도 베이스로 쓰인 술인데, 온지음에서 직접 담갔단다. 35도. 소주에 영귤을 침출 한 게 아니라 영귤주를 담가 증류했다고 했는데 그런 것치고는 영귤향이 많이 강했다. 음식을 먹을 때는 산미 있고 깔끔한 술이 매칭하기가 좋은데, 전통주에는 그런 술이 많아 의도적으로 이런 맛의 술을 만들었나 싶었다.
- 산적과 장어구이
. 이렇게 스테이크스러운 산적은 처음이었다. 우둔살을 배즙에 절였다가 참기름에 구웠다고 하는데, 전반적으로 부드럽고 상큼하고 달콤했다. 한식 파인 다이닝에서도 메인은 스테이크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사실 우둔살보다는 등심이나 안심이 맛있어서, 절대적인 맛은 스테이크가 더 나을지 몰라도, 나는 한식 파인 다이닝에서는 이런 음식이 나오는 편이 더 반갑고 재밌고 좋다.
. 장어는 간이 세지 않고 담백하게 나왔다. 한 조각은 그냥, 한 조각은 김가루 밥이랑 같이 나와서 서로 다른 느낌으로 먹기 좋았다.
(사실 이쯤 되어서는 배가 너무 불러서 정신이 혼미해져가고 있었다.)
. 그리고 같이 나온 깻잎. 배 간 것과 2002년에 담근 매실액으로 맛을 냈단다. 보통 고기랑 곁들이는 깻잎은 생이거나 풀을 죽여 장아찌로 내는데, 생생한 깻잎을 살짝 마리네이드 해서 낸 게 새로웠다.한식 파인 다이닝에 오면 이런 미묘한 변주를 캐치할 수 있어 좋다.
- 식사, 열무 보리비빔밥과 연계 길경탕
. 열무를 기가 막히게 데쳤다. 잎사귀도 살아있는데, 줄기도 적당히 잘 데쳤다. 마치 멘보샤를 튀기면서 겉의 식빵도 안 태우면서 속의 새우도 잘 익히는 것처럼. 감자도 멋지게 포슬거려서 인상적이었다.
. 맛은 상상 그대로의 맛이었다. 그릇에 들어간 장 없이 열무에 무쳐진 된장만으로 비비니 진짜 재료들 맛만 났다. 나는 배가 불러서 장의 힘이 필요했다. 따로 준 된장 약 고추 장아찌 다진 걸 넣으니 맛이 살았다.
. 연계 길경탕은 닭과 도라지를 달이고 돼지 육수 살짝 섞었다고 했다. 한 그릇 먹고 나면 더위를 먹지 않을 것 같은 맛이었다. 도라지랑 닭 육수랑 이렇게 잘 어울리는구나 감탄했다. 집에서 삼계탕 할 때 도라지를 좀 넣어야겠다 싶었다.
- 디저트, 수박빙수
. 이것도 맛이 뛰어났다. 수박 얼음과 알알이 살아있는 팥은 재료 그대로의 맛이었다. 이 두 가지만 있었으면 '건강한 맛'에 그쳤을 텐데, 새콤달콤한 매실 장아찌 다짐이 들어가서 포인트가 생기고 맛있었다.
- 디저트 2, 무화과 정과와 죽순껍질 덖은 차, 두텁 파이
. 남편이 자기는 무화과 별로 안 좋아한다면서 '어디 무화과를 얼마나 맛있게 했는지 보자' 하더니, 무화과 정과를 입에 넣자마자 '맛있네?' 했다 ㅋㅋ
. 죽순껍질 덖은 차도 진짜 맛있었다. 구수한 차들은 대개 텁텁함이 남았는데, 이 차는 그러지 않았다. 직접 죽순 껍질을 덖어냈다는데, 인터넷에 찾아보니 비슷한 것들을 팔아서 사 마셔 봐야겠다.
. 두텁 파이는 두텁떡의 재료들로 맛을 낸 파이였는데 나는 그냥 그랬다. 계피맛은 좀 더 촉촉한 떡이나 수분감이 더 있는 빵에 곁들이는 게 나는 좋은 것 같다.
음식 외에도 여러 가지가 좋았다.
청와대와 경복궁의 끄트머리가 아주 조금 보였는데, 경기도민에게는 꽤 감격적인 풍경이었다. ㅎㅎ 특히 여름의 저녁이라 그 풍경을 아주 오래 볼 수 있어 좋았다.
저너머 작게 보이는 궁궐 ㅎㅎ
서비스도 정말 좋았다. 나는 음식에 관심이 많으니, 아무래도 이것저것 묻게 된다. 가능한 자제 하려고 하지만 질문을 하기는 하게 되고, 서버 분들이 요리사는 아니니 가끔은 막히기도 하는데, 여기는 그런 게 없었다. 재료든 요리법이든 어느 쪽으로 질문하든 한 번은 대답할 정도로 교육되어 있었다. 이런 게 서비스의 차별화지 싶었다.
양이 많아 인상적이었다. 나는 음식을 많이 못 먹는 편이라 상관없지만, 대식가인 남편은 파인 다이닝에서 배가 아주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남편마저 엄청 배부르게 나왔다.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았다. 포털에서 나오는 코스 가격 대비 가격이 인상되었다는 건 예약할 때 알림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메뉴판에서 보고 시킨 전통주 페어링도 7만 원에서 9만 원으로 올라 있었다. 메뉴판은 다시 인쇄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하지만 그건 소소한 점이고 대체로 아주 만족했다. 정말 신경 써서 만든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고 나온 느낌. 나야 워낙 음식에 관심이 있어 이런 곳을 종종 가지만, 나만큼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도 파인 다이닝은 한 번쯤 가볼만한 것 같다. 일을 하다가 가끔 친구를 만나거나 취미생활을 해서 리프레쉬를 하는 것처럼, 이런 미식 경험도 사람의 기분을 새롭게 해주는 것 같다. 특히 한식 파인 다이닝은 다른 파인 다이닝보다 그 변주나 신경 씀을 느끼기가 쉬워서 추천한다. 한 끼 식사로 비싸긴 하지만, 호캉스 한 번 다녀온다 생각하고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개인적으로는 요즘 회사일과 육아에 치여서 배 채우려고 먹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래간만에 이런 음식을 먹으니 정말 즐거웠다... ㅎㅎ 다음에는 아이 봐주느라 고생한 우리 엄마랑 같이 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