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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대리 Jun 23. 2023

역류성 식도염 환자의 술 마실 계획

제약이 주는 기쁨




역류성 식도염에 걸렸다. 두둥.


알코올, 카페인, 매운 음식, 기름진 음식 먹지 말라고 한다. 아니 그럼 뭘 먹으라는 것인가!


기 위해 사는 내가 이런 병에 걸린 게 기가 막혔다. 그것도 지금 시점에! 나는 한국에서 남은 1달 반의 시간 동안 한국 음식과 술을 실컷 탐닉하다가, 미국으로 가서는 또 새로운 미식의 세계 (특히 내가 좋아하는 나무향 짙은 버번위스키!)를 탐닉할 계획이었단 말이다...

 

그것도 휴직을 코 앞에 둔 시점에 회사 일로 스트레스받아 병에 걸린 게 어이가 없었다.

부사장님도 날 안 쪼았는데 혼자 잘해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노예 중 탑 노예다...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수정했다. 선택과 집중 체제다.



1. 한국의 매운 음식과 술을 깔끔하게 버린다.

이제까지 먹을 만큼 먹어봤고, 돌아오면 먹을 수 있다. 유학 기간 동안 경험할 새로운 미식 세계를 즐기기 위해 한국에서는 최대한 자제한다.


2. 카페인도 포기한다.

하루 2잔씩 마시던 커피도 완전히 끊었다. 다행히 우려하던 카페인 금단 증상(극심한 두통 등)은 오지 않았다. 그냥 평소보다 조금 나른한 정도.

의외로 커피 맛을 끊기 어려웠다. 회사 커피 맛도 없는데 신기한 일이었다. 하루에 한두 잔 디카페인으로 갈음하고 있다.


대신 디저트를...


3. 미국에 가서는 일주일에 한 번 음주 데이를 가진다.

미국 가서는 매운 음식은 피하기 쉽겠지만, 술은... 원래는 매일 한잔 씩은 하려 했다. 하지만 과감히 일주일에 딱 하루, 한잔으로 줄이기로 했다. 지금은 역류성 식도염 상태가 많이 안 좋지만, 그때까지 조심하면 이 정도는 설마 버텨주겠지.

 



이렇게 계획하고 나니 오히려 음주 데이를 더욱 잘 즐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을 바라보며 일주일의 힘듦을 버티고, 내게 주어진 한잔을 더욱 소중하게 음미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리가 불편해졌을 때도 그랬다. 예전에는 새로운 전시가 열릴 때마다 가보았는데, 이제는 정말 못 견디게 보고 싶은 전시만 고르고 골라서 간다. 전시를 가서도 보다가 쉬다가, 보다가 쉬다가를 반복한다. 그렇게 한나절을 걸려 본 전시는, 조금 더 깊게 내 마음에 남는다. 워킹맘으로 살면서 아주 가끔 얻는 자유시간도 그랬다. 술도 그럴 것 같다.


그 중 하나가 김환기전. 좀만 더 있었으면 엉엉 울다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이런 제약이 조금씩 생길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즐길 방법을 고민하고, 더 작아진 기회를 더 깊이 음미하고 싶다. 지금부터 잘 훈련해 봐야지! 부디 난이도가 서서히 높아지길 (제약이 감당할 속도로 남들만큼만 늘어나길) 바랄 뿐이다.



+) 이렇게 야심 차게 다짐해 보지만, 실은 일주일 한번 음주데이 마저 어려우면 어쩌지 걱정이긴 하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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