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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대리 Sep 26. 2023

순도 100% 국내파 아줌마의 아이비리그 수업 듣기

미국생활 35-36일 차



나는 어학연수도, 교환학생도 한번 가본 적이 없다. 대학 동기들 사이에서도 드문 순도 100%의 국내파다. 그런 내가 사회 과학 관련 전공으로 미국 대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있다.


쉽지 않다. 내가 조금이라도 아는 분야에 대한 얘기면 그나마 할만한데, 기후 과학 수업과 법 수업은 처음부터 패닉이었다.


기후 과학 수업 숙제. 난 뭘하고 있는 것인가


기후 과학 수업의 경우, 물리학과 지구 과학, 논리 연산 등의 지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이 중 어떤 것도 못하고, 관련된 영어 표현은 더더욱 알 길이 없었다. 심지어 처음에는 a/b가 a under b 인지 b under a 인지도 헷갈렸다. 그러니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나마 이 수업은 오프라인 수업 전에 온라인 수업을 듣는 형식이라 철저한 예습이 가능하고, 나 말고도 모두가 헤매고 있어서 괴롭지는 않다. 괴롭지 않으니 점차 나아지고 있다.


진짜 괴로운 건 법 수업이다. 보통의 강의는 대략적으로 알아듣는데, 법수업은 단어가 달라서 그런지 놓치는 게 많다. 미국에서 유명한 여러 가지 사례를 가지고 설명하는데 나는 그런 사례들 때문에 더 헷갈리기도 한다.

키스톤 파이프라인도 미국 애들은 다들 아는데, 나는 특정 케이스라고 프로세싱하는데도 시간이 한참 걸린다


이 수업만 해도 사전 리딩 숙제가 매번 80페이지는 되는데, 법 관련 문서는 더 안 읽힌다. 구글 번역기나 파파고 등에 도움을 요청해도 도움이 안 된다. 걔네가 번역해 준 문장을 보면 더 모르겠다.


그래서 지난 수업에는 사전 리딩 숙제를 다 못하고 갔다. 딸내미 적응에 혼이 나가 있던 때라 다른 대부분의 수업도 그랬으니 이건 더했다.


이번주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제 아이도 적응했고 핑계도 없다. 이 수업을 넘어야 했다. 게다가 다음 주에는 리딩 요약 발표도 해야 하고, 그 준비를 위한 조모임도 수업 직후에 있었다. 160장을 읽어가야 했다. (참고로 이 수업을 듣는 날 다른 수업도 있다. 모든 수업이 이 정도의 리딩을 요구한다.)


주말에 아이와 하루 한 군데씩 가고, 그 이외의 시간에는 리딩을 했다. 리딩을 완료한 건 일요일 자정이 되어서였다.


몇 시간 연달아 영어 문서를 읽으려니 에너지가 너무 딸려서, 딱히 효율적인 수단은 아니지만 번역기를 써서 읽다가 다시 영어로 읽었다가를 반복했다. 다 읽고 나서는 얼마나 뿌듯하던지. 오늘 수업 가는 길이 그렇게 상쾌할 수 없었다.


다른 수업 준비가 남아서 월요일 아침에 아이 등원하자마자 또 도서관에 가야했지만


하지만...


또다시 한 마디도 못했다. 미국 수업은 참여 점수가 높아서, 학점을 받으려면 반드시 발표나 질문을 해야 하는데 큰 일이다. 일단 내가 수업을 100% 따라가지 못했고, 내가 이해하고 머릿속에서 프로세싱해서 손을 들 떼면 이미 다른 누가 먼저 손을 들어 말을 하고 있었다.


사실 언어뿐 아니라 말하는 것도 어렵다. 외국 애들은 말을 하는 역치가 절대적으로 낮다. 뭐 이런 거까지 다 물어보나 싶은 것도 물어보고, 얘기를 하기 위해 하는 것 같은 경우도 많다. 한국은 아무리 참여 점수가 중요해도 그런 일은 잘 없다. 하지만 한국 스타일로 있다 보면 혼자만 입 다물고 있는 꼴이 된다.


수업을 마치고, 다음 주 리딩 요약 발표 준비를 위한 조모임을 했는데 이 때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조 그 누구보다 준비에 공을 많이 들였을 텐데도 한마디도 못했다. 나 빼고는 다 미국 애들이었는데 속사포 같이 쏟아내는 말을 끄덕이며 듣다가, 내가 하고 싶던 부분은 다른 애가 말하면서 선점하고 결국 '아무 부분'을 내 부분으로 받아 왔다.


돌아와서는 기분이 안 좋았다. 내가 이 수업을 무사히 완주할 수 있을까도 모르겠고, 언어 때문에 이런 고역을 겪는 것도 서러웠다. 우선 교수님께 고민 상담 차 면담 요청 메일을 보냈다.


회사에서 배운 것. 이슈가 있으면 즉각적으로 리포팅 한다. ㅎㅎㅎ 사진은 주말에 딸내미와 뉴욕 현대 미술관.


그러고는 딸내미를 데리고 플레이 데이트를 했다. 어차피 수업 2개를 연달아 듣고 조모임까지 하고 나면 공부하긴 어려울 것 같았고, 오늘은 아이 학교 휴일이라 남편이 독박 육아를 해서 플레이데이트를 잡아뒀었다. 플레이 데이트를 하고, 저녁을 먹이고, 아이를 재웠다. 그러고 공부를 하려다가 아직도 딱히 공부하고 싶진 않아 디카페인 커피를 한잔 내리고, 15분 짧은 요가를 하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생각해보면, 이런 일은 이 수업이 아니라 언제라도 일어났을 거다. 잘 겪어내는 수밖에 없다.


내 선택으로 미국에서 공부하는 거고, 그럼 언어 때문에 더 공부가 힘들어지는 건 감당해야 할 일이다. 감당하다 보면 감당하는 일에 익숙해질 거다. 씩씩하게 더 준비하고 더 공들이면 된다. 그리고 이제 제대로 준비한 첫 수업에 말 못 했다고 주눅 들지 말자. 나에게 시간을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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