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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뉴욕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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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대리 Oct 23. 2023

개고생

미국생활 61-62일 차




뉴욕이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아주 오래된 지하철과 남의 눈치 안 보는 문화는 꽤나 불편할 때가 많다. 이런 불편이 연달아 겹치면 우리 같이 효율을 중시하고 빨리빨리에 익숙한 사람들은 타격이 크다.


어제오늘이 그랬다. 어제저녁에는 센트럴 파크에서 하는 드론쇼를 보러 갔다. 엄청난 수의 드론이 센트럴 파크의 밤하늘을 수놓을 예정이라고 해서, 저녁을 서둘러 먹고 아이를 재촉해서 나섰다. 7시/ 8시/ 9시에 쇼가 진행될 예정이었고, 몇 군데 추천 관람 장소가 있었다. 우리는 7시 시간에 맞춰서 나섰다. 여유 있게 출발하지는 못했고, 이미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추천 관람 장소에서 2-3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놈의 드론들이 뜨다 말았다. 딱 나무 높이까지만 뜨는 바람에 나무에 온통 가려서 하나도 보이지가 않았다. 안전이나 규정 때문인가 싶었지만, 이만큼 뜨는 걸 드론쇼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사람이 이만큼 모이는데 딱 추천 장소에서만 볼 수 있다고? 싶기도 하고.


사람과 어둠 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쇼가 끝나고 남편은 집에 가자는 걸, 아이도 오래간만에 밤에 나오니 들어가기 싫어하는 걸 핑계로 8시까지 버티자고 했다. 그런데 그게 패착이었다. 7시 25분 즈음 미리 관람 장소에 도착해서 기다리는데, 사람들은 점차 밀려들고 다들 서서 기다리는데 옆에선 담배를 피워대고 어디선 비집고 들어오고 난리였다. 아이한테 동영상이라도 보여주고 버티고 싶었는데 너무 사람이 많아서 인터넷도 안 터졌다. 우리나라였음 이 만큼 사람들이 모이는 행사가 있으면 모바일 기지국들이 잔뜩 왔을 터였다. 아이를 안았다가 쪼그려 앉아서 같이 놀다가 하며 35분을 간신히 버텼다.


아니 그런데 8시가 돼도 쇼가 시작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였음 난리가 났을 텐데 사람들이 곧잘 버텼다. 그렇게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고... 13분이 되어서야 쇼가 시작했다. 진짜 그때까지 사람들이 아무 말도 안 했다. 우리는 15분까지 기다리다 안 하면 자리를 뜨려고 하긴 했지만, 사실 아무도 불평을 안 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진짜 쇼를 안 했다면 자리를 빠져나오지도 못했을 거다.


그래도 예쁘긴 했다. 예쁜 정도에 비해 고생이 너무 컸을 뿐. 그래 어떻게 맨날 홈런에 안타를 치겠나


드론쇼는 괜찮았다. 주변 모든 사람들과 밤하늘을 함께 보며 반짝이는 드론들을 감상하는 기분이란 나쁘지 않았다. 아이도 처음에는 피곤하다고 드론들 빨리 가고 집에 갔으면 좋겠다더니, 나중에는 사라지는 게 아쉽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너무 지쳐서 남편은 다시는 공짜 쇼는 보러 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남편의 초점은 공짜는 퀄리티가 낮다였다. 나는 몰랐는데, 이런 경험이 몇 번 있었단다.) 나는 안 그래도 집돌이인 남편이 이제 다시는 같이 안 다닐까 봐 눈치 보고. ㅋㅋ


그리고 오늘은 배터리 파크에 갔다. 남편이랑 아이랑 같이 간 적이 있는데, 거기 놀이터를 아이가 그렇게 좋아했단다. 기온이 10도쯤 돼서 쌀쌀하긴 했지만 햇빛도 있고 아이랑 뛰어놀다 보니 있을만했다. 몇 번의 외출을 통해 아이랑 바깥에 나오면 사 먹을게 마땅치 않고 비싸다는 교훈을 얻어, 간식뿐 아니라 볶음밥까지 잔뜩 싸왔더니 자리를 뜨지 않고 내내 놀 수 있었다.


딸내미가 엄청 좋아하는 미끄럼틀들. 가파른데다 돌로 되어 있어 엄청 빨리 내려온다. 딸내미 따라 몇 번 타니 정신이 혼미하더라


2시간을 넘게 놀다가, 근처에 남편이 보고 싶어 했던 월가 황소 동상도 보고 뉴욕 증권 거래소도 갔다. 남편은 블루보틀 데뷔도 하고. 그렇게 잘 놀다 오는데 이 놈의 대중교통이 또 문제였다.


황소상 근처에 사람이 미어터졌다


뉴욕 대중교통은 툭하면 중단되거나 돌아간다. 수시로 이런 이슈가 있고, 이런 이슈는 구글 맵이나 공식 앱에 제대로 공지되지도 않는다. 우리나라였음 또 난리가 났을 텐데, 여긴 다들 그러려니 한다. 구글 맵을 보고 집으로 가는 1호선 지하철 역까지 찾아갔는데 역에 A4용지로 지하철이 안 선다고 쓰여 있었다. 그때까진 괜찮았다. 다음 역도 가깝고 아이도 킥보드를 타고 있어서 다음 역으로 갔다. 원래 남편이 다음 역 쪽 (월드 트레이드 센터)을 혼자 더 구경하고 싶어 하기도 했고. 거기서 남편과 헤어져 아이만 데리고 집에 갈 생각이었다. 간 김에 잠깐 함께 구경을 하고 함께 역으로 향했다. 그런데 지하철이 또 안 선다는 것이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주변 몇 정거장은 1호선이 운행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쯤 되니 남편은 혼자 구경하기를 포기하고 함께 집으로 향하기로 했다. 나중에 남편은 이 선택을 하길 정말 잘했다고 했는데, 그 이후로도 역경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잠시 메모리얼 파크를 들렀다


근처 R/W 라인으로 가서 지하철을 타고 충분히 북쪽으로 올라가서 집으로 가는 1호선을 갈아탔다. 그런데 여기는 별다른 공지도 없는데 1호선이 안 오는 듯했다. 지선인 1호선과 같이 운행하는 급행 2, 3라인은 온다는 표시는 되어 있는데, (뉴욕에는 한 라인을 지선/ 급행이 함께 운행하곤 한다.) 전혀 안 오고 있는지 역에 사람들이 미어터졌다. 남편이 빠르게 손절을 하고 또 다른 C/E 호선으로 향했다. 먹을 건 바리바리 싸들고 나왔지 그 와중에 할인한다고 중간에 마트에서 아이 간식거리도 잔뜩 샀지, 가방은 많고 아이는 킥보드 위에서 졸고 ㅋㅋㅋ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래도 C호선만 갈아타면 좀 걷더라도 집 근처까지 간다는 생각에 힘을 내서 갈아타러 갔다. 가니 마침 C와 함께 운행하는 E호선이 와서 얼른 탔다.


이미 딸내미는 놀이터에서 부터 이런 상태였다. 이후 다시 잘 놀긴 했지만, 지하철에서 무한 헤멜때는 서서 조는 상태가 되었다 ㅠㅠ



그런데, E호선이 뭔가 이상했다. 알고 보니 C와 중간에서 노선이 갈렸다. 허둥지둥 내려서 다시 지하철을 B/D호선으로 갈아타고 나서야 제대로 C를 탈 수 있었다. 쓰다 보니 또 아찔하다. 막혀있는 지하철 역들을 헤맨 걸 포함하면 7번의 시도/ 갈아타기 만에 집에 갈 수 있었다. 중간에 나가서 택시를 타도 됐을 텐데, 이번만 가면 해결 된다는 생각에 연달아 고생을 했던 것 같다. 낮잠 시간이 지나서 조는 아이와 짐을 잔뜩 들고, 추운데 노느라 완전히 지친 상태에서 돌아오느라 진짜 고생했다. 어제는 행사 끝나고 투덜거리는 남편 눈치를 보면서 집돌이 남편 꼬셔서 다니기 쉽지 않다고 내심 생각했는데 ㅋㅋㅋ 오늘은 싸우지 않고 함께 잘 버텨준 남편이 마냥 고마웠다.


오래된 선진국과 신흥 선진국의 차이인 듯하다. 여기는 오래된 선진국이니 인프라도 오래되고, 사람들도 조금 더 여유나 체면이 있어 뭔가 잘 안 되는 것에 대해서도 이해심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여유 없는 뚜벅이는 쉽지 않다. 다음에는 주말에 대중교통이 안 풀리면 그냥 포기하고 바로 택시를 타야겠다. 이렇게 또 배운다.


고생하고 돌아와서는 남편과 좀처럼 꺼내지 않는 라면을 끓여 먹었다. 절대적으로 비싸진 않지만 한국보다 비싸서 괜히 잘 안 먹게 되는 ㅋㅋ 밖에서 열심히 놀고 대충 먹고 졸린데 잘 따라와 준 딸내미도 특별히 라면을 줬다. 라면 사리만 넣고 육수랑 건더기는 따로 제조해서 ㅎㅎ 배도 고팠겠지만, 딸내미는 라면 사리도 그렇게 짭짤한 면 요리도 처음이라 맛있다면서 열심히 먹었다. 딸내미한테 물어보니 오늘 하루 어어엄청 재밌었단다. 진짜 엄청 고생했지만, 딸내미가 재밌었다고 해서 피로가 좀 풀렸다. 이렇게 함께 저녁 먹을 가족이 있고 따뜻한 집이 있다는 사실도 감사했고. 타지에서 안 맞고 어려운 것도 많지만 가족들이 함께라 든든했다.


내일은 연달아 수업이라 남편과 내가 점심으로 먹을 콩샐러드도 해놓고. 내가 해줄 수 있는게 잘 먹이는 것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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