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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뉴욕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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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대리 Nov 03. 2023

순도 100% 현지인 할로윈

미국생활 72일 차



처음으로 맞는 할로윈을 어떻게 보낼까 걱정이 많았는데, 좋은 친구들 덕분에 할로윈을 제대로 보냈다. 1차는 딸내미 친구네와 함께한 Trick or Treat + 저녁 식사였다. 대대로 뉴욕에서 살아온 찐 뉴요커인 이 부부는 학기 초부터 우리 부부에게 친절하게 말 걸고 집에 초대도 해주더니 이번엔 할로윈도 같이 보내자고 제안해 주었다.


아이가 하원하고 간식을 챙겨 먹고 옷을 갈아입은 후, 4시에 거리에서 만났다. 보통 4시에 만 3-4세 아이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하고, 초등학생쯤 되면 6시쯤, 7시쯤에는 10대들이 다닌다고 했다. 만나서는 근처의 가게들을 쭈욱 돌았다. 보통 Trick or Treat은 집을 돌아다니면서 하지만, 뉴욕은 대부분 사람들이 주택이 아닌 아파트에 살아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Trick or Treat을 하기 쉽지 않아 가게를 돌아다닌다고 했다. 이게 뉴욕만의 특징이긴 한지, 학교의 미국인 동기들이 나에게 여기선 어떻게 Trick or Treat을 하는지 아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할로윈 대신 캐릭터 데이라고 하면서, 피나 공격적인 장식은 지양해달라고 했다.


프랜차이즈 말고는 거의 모든 가게가 Trick or Treat에 참여했다. 그게 참 신기했다. 우리가 꽤 이른 시간에 다닌 걸로 알고 있는데도, 가게마다 아이들이 줄 지어 서 있었다. 나눠주는 초콜릿이나 사탕 값만 해도 어마어마할 것 같은데 이걸 다들 참여하는 게 신기했다. 늘 한산해 보이는 꽃집이나 세탁소에서도 할로윈 장식을 잔뜩 해놓고 아이들을 맞이했다. 대부분 웃는 얼굴로 맞이해 주고. 이렇게 사탕을 나눠주는 게 가게를 알리는 수단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효과가 얼마나 클지는 잘 모르겠다. 호의가 더 클 것 같다. 이런 데서 이 나라의 여유를 느낀다. 남 눈치 보여서 하는 행동이라도, 눈치를 볼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거니까.


딸내미는 Treat 덕인지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Trick or treat’ ‘Thank you’ ‘Happy Halloween’ 을 잘 외쳤다



집을 아예 안 돌지는 않았다. 아파트마다 미리 Trick or treat에 참여할 가구를 조사해서, 1층에 리스트를 붙여놨다. 우리는 딸내미 친구네 아파트에서 했다. 20 가구쯤 사는 건물에서 5 가구 정도가 참여했다. 한 집은 문 앞에 사탕 바구니를 내놓았지만 보통은 아이들이 문을 두드리면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이곳 아파트는 보통 현관에서 거실/ 부엌까지 거리가 꽤 있어서, 문을 두드리면 문 바로 앞에 서 있거나 신경을 잔뜩 쓰고 있지 않는 이상에야 소리를 잘 못 듣다. 그런데 오늘만은 다들 꼬마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창 저녁 준비할 시간에 아이들이 조막만 한 손으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다들 듣고 나와서는, 옷에 대해 물어보고 칭찬하고 사탕을 나눠주었다. 보기만 해도 따뜻한 마음이 드는 광경이었다.


집을 다니는게 더 귀엽긴 했다 ㅎㅎ 문 열리길 애닳게 기다리는 아이들 ㅎㅎ


1시간쯤 돌고 사탕을 한 아름 안고 딸내미 친구 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 아빠가 중간에 미리 들어가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메뉴는 미트로프와 매쉬드 포테이토와 구운 그린빈스. 완전 미국식 요리였다. 테이블 가운데에는 말린 옥수수와 갈대 등이 장식되어 있었는데, 가을에 많이 하는 테이블 센터피스로 'Cornucopia'라고 한다고 했다.



마침 그 집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도 와 있어서 정말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딸내미는 피곤했는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남에 집에서 잠이 들어 버렸는데, 그 집 외할머니나 아빠가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아 두 나라의 차이점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게 재밌어서 아이를 안고 한참을 수다 떨며 커피에 디저트까지 얻어먹고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셰프의 요리법을 따랐다고 했다. 공통점 +1!


그러고는 동기 둘이 함께 사는 집에서 하는 할로윈 무비 나잇에 갔다. 원래는 약속이 겹쳐서 못 갈 줄 알았는데, 7시 반쯤 딸내미 친구 집을 나서서 갈 수 있었다. (초대해 준 것도 고마운데 올 수 있게 되면 언제든 오라고 까지 얘기해 주었다.) 숙제가 잔뜩 밀려서 이젠 공부해야 하나도 싶었지만, 내가 언제 또 할로윈 무비 나잇을 갈까 싶었다.


8시쯤 시작해서 영화를 같이 보는 일정이라 나는 가볍게 생각했는데, 동기들이 이것저것 잔뜩 준비해 뒀다. 스파이스드 사이다 (계피, 올스파이스 등이 들어간 따뜻한 사과 주스)/ 하드 사이다 (알코올이 들어간 주스)/ 와인에 할로윈 기념 사탕과 초콜릿에 호박 치즈 파이에 석류 등등. 엠앤엠 그릇 앞에는 '개구리 눈알'이라고 종이에 적어놓고 그 종이 주변을 불로 태우는 깜찍한 장식들도 있었다.


아이 사진 좀 잘 찍고 싶다…


둘러앉아서 30인치 정도 될 것 같은 작은 모니터로 90년대에 나온 정통적인 할로윈 영화라는 애덤스 패밀리를 봤다. 호러를 좋아할 뿐 착한 가족이 악당의 음모에 휩싸였지만 잘 이겨내는 내용이었는데, 영화도 귀여웠다. 오밀조밀 모여 사진 찍고 수다 떠는 동기들도 귀여웠고 ㅎㅎ 뒤늦게 대학원을 와서 자꾸 내가 20대 중반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낀다. (좋다.)


옹기종기


원래 약속이 없을 줄 알고 뉴욕 할로윈 퍼레이드를 갈까 했는데, 이렇게 현지인들 사이에 끼어서 할로윈을 보내게 되었다. 할로윈 퍼레이드도 굉장히 유명하지만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남편도 아이도 신나게 즐겨서 더 뿌듯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뉴욕에 왔을 때는 약간 막막했는데, 이렇게 따뜻한 할로윈을 보낼 수 있어서 참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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