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뉴욕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솜대리 Nov 12. 2023

아이와 외출 테스트_자연사 박물관, 5번가

미국생활 72-73일 차



뉴올리언스 여행 때만이 아니라 뉴욕에 온 이후 내내 가족끼리 외출할 때마다 남편과 갈등을 겪고 있다. 왜 여기 와서 그런 걸까 생각해 보면, 새로운 환경 외에도 또 다른 요인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내가 1년 넘게 다리 부상에 시달리는 바람에 아이가 좀 크고 다닐 만 해지고 나서는 오히려 키즈 카페 외에는 가족 외출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이제까지는 내 다리 부상 뒤에 우리 부부의 잠재적 갈등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해결책을 찾아야만 하는 문제다.


우선 내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보기로 했다. 사실 1년 넘게 내가 거동이 불편했고 요즘도 100% 편한 건 아니다 보니 외출하면 더더욱 남편이 아이를 마크한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태세를 바꿔보기로 했다. (남편 그간 고생 많았다 ㅠㅠ) 첫 번째 테스트 장소는 자연사 박물관이었다.


건물 자체도 으리으리 하다


자연사 박물관은 아이가 온 지 두 달 만에 다섯 번은 간 것 같다.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의 배경지인데, 거기에 나오는 공룡 화석만 해도 아이가 매주 볼 수 있을 지경인데 그 외에도 찬찬히 살펴보자면 한 달은 볼 수 있을 만한 콘텐츠들이 가득하다.


그러고보니 이주 전에도 동기 아이들이랑 갔었다 ㅎㅎ


그간 많이 날을 세웠으니 오전에는 남편과 카페를 갔다가 (뉴욕에서 남편이 카페를 간 건 두 번째다. 여기 와서 우리 생활 수준이 정말 낮아진 걸 느낀다 ㅋㅋ 굉장히 평이 좋은 곳을 갔는데 적당히 괜찮았다. 진짜 우리나라 카페가 좋은 곳이 많다.) 센트럴 파크를 산책하고 장까지 보고, 나는 박물관에 가서 과제를 하고 있고 남편이 아이를 데려왔다.


단풍은 지고 있지만 그래도 가을 분위기가 물씬해서 좋았다 ㅎㅎ


뉴욕 거주자는 원하는 만큼만 지불하고 일반관 티켓을 살 수 있어서 주로 그렇게 관람하다가, 오늘은 특별전 2개도 함께 봤다. 하나는 플라네타리움 (깜깜한 극장에 앉아서 하늘에 쏘아진 우주 영상을 관람했다.), 하나는 나비 체험전이었다. 플라네타리움은 조용하고 가만있어야 하는 특성상 남편이 예민해지기 쉬워, 애초에 내가 가운데 앉았다. 다행히 아주 조용한 분위기는 아니라 관람 시간 30분 내내 아이에게 동시통역 (도 아니고 쉬운 버전으로 콘텐츠 변환 통역)을 해주며 잘 보낼 수 있었다.


멋지다 ㅎㅎ


나비 체험전은 별도의 공간에 나비를 잔뜩 키우고 있어서, 나비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나비가 관람객에게 앉기도 한다고 해서 아이가 나비를 계속 기다린 덕에 그곳도 조용히 지나갔다. (하지만 관람객에게는 거의 앉지 않고 직원들에게만 앉았다. '더 익숙해서 그런가?'라고 했더니 아이가 '먹이를 주는 사람이라서 그래'라고 알려줬다. ㅋㅋ) 일반 관람 공간인 곤충관에서도 아이를 데리고 다니다가 막판 15분 정도만 다리가 아파서 남편과 바통터치했다.


망부석 ㅎㅎ


남편이 피곤해하는 상황에서도 아이를 내가 잘 데리고 다녀서, 아이도 즐겁고 남편도 버럭 안 하고 잘 보냈다고 뿌듯해하고 있었다. 목욕 시간 전까지는. 남편이 매일 목욕을 시켜주는데 (남편 고생이 많다 ㅠㅠ) 아이가 다리가 아프다고 몇 번 찡얼 대자 남편이 '아 좀 조용히 좀 해!' 하고 버럭 했다. 이런... 하루의 고생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또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보겠다고 다짐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오늘은 남편이 친구네 집에 갔다. 내일 친구네 동네 (프린스턴)에서 친구와 아침에 하프 마라톤을 뛰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 기회에 남편과는 절대 못 갈 곳으로 아이와 놀러를 갔다. 또 무슨 영화에 나왔던 뉴욕의 유명한 장난감 가게 'FAO Schwarz'와 레고 스토어! 남편이 가면 아이가 전시된 장난감에 손이라도 대보거나, 어쩌다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히면 버럭 해서 아이는 잔뜩 풀이 죽고, 나는 잔뜩 화가 나고, 그럼 아이는 자기는 장난감 안 좋아한다고 하고, 나는 아이가 안타까워서 더 화나고, 남편은 나한테 화나고 악순환의 고리가 생길 게 불 보듯 뻔한 장소다.


아이와 엄청 재밌게 놀았다. 피곤은 했지만 진짜 좋았다. 두 군데 다 볼 것도 많고 체험할 것들도 있어서 구경만 해도 재밌었다. 아이는 (언제나처럼) 체험할 때 순서도 잘 지키고, 다음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걸 알려주면 양보도 잘했다. 지나가다 실수로 쳐서 떨어트린 물건은 바로 제자리에 올려놓고. 내가 보기엔 기특하기만 한데.


아이에게 작은 것 하나씩만 사주기로 해서, 장난감 가게에서는 작은 아이 시계 하나를 샀고 레고 스토어에서는 레고 사람 모형 3개를 샀다. 평소 잘 안 사주니까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이건 안 사는 거지?, 다음 내 생일 때 사줘' 하는 게 안타깝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다.


보기만해도 꿈과 희망이 가득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 FAO ㅎㅎ


남편 없이 외출하니, 남편도 좋았을 거고 우리도 남편 눈치 안 보고 맘 편하게 놀았다. 내 다리도 잘 견뎌줘서,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 남편이 예민하게 굴 곳은 아예 따로 다니는 게 좋겠다 싶다가도 그래도 같이 다니고 싶고 어렵다. 내가 육아 휴직할 때를 생각하면 예민해질 때 해결책은 자유시간이었는데, 남편은 그 케이스도 아닌 것 같고. (게다가 아이가 어린이집도 다니고, 아침마다 남편은 달리기도 하고 내가 종종 데리고 나가기도 한다.)


레고스토어는 곳곳에 멋진 작품들이 가득했다 ㅎㅎ


참 다른 남편과 만나 살면서, 아이를 낳기 전에는 항상 맞지 않는 부분은 굳이 맞추려 노력하지 않고 따로 행동하는 걸 택했는데 이번에도 그런 게 답일까 싶다. 일단 같이 가서 따로 다니고, 내가 화장실 가고 싶을 때나 다리가 아플 때만 남편을 부르거나. 조금 더 테스트해봐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온 가족 링컨센터 공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