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생활 100일 차
나는 처음에 이 많은 숙제들을 어떻게 해내가나 싶었다. 리딩 과제만 하다가 하루가 다 끝나는데. 나는 자정까지 읽어도 다 못 읽는데 얘네들은 수업시간에 너도나도 손을 들고 유창하게 자기 생각을 펼쳐 나갔다. 나는 손도 못 댄 과제를 미리미리 다 해놓고. 졸업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러다간 졸업도 못하겠다 싶어서 긴장감이 확 들었다. 먼저 미국에서 석사 한 지인들한테 연락해 보니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긴다고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보다 보니 다들 대강대강 했다. 컬럼비아도 박사는 절반을 탈락시킨다던가 하는 것 같던데, 석사는 MBA가 아니라 나 같은 일반 석사도 웬만하면 졸업을 시켜주는 모양이다. 리딩을 안 해오고 수업시간에 적당히 손만 드는 아이들도 많았고, 조모임을 해보면 한국에서 이렇게 하면 밤에 뒤통수 조심해야 할 텐데 싶을 정도로 최소한의 최소한만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중간고사 성적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해나가다 보니 감이 잡혀서 나도 슬슬 적당히 한다. 적당히 해도 할 게 너무 많기는 하지만 부담은 훨씬 줄었다. 하지만 갈 길이 멀었다는 걸 오늘 알았다.
한 수업에서 기말고사 대신 리포트를 써서 내야 하는데, 각자 지정받은 분야에 대해 논쟁을 불러일으킬만한 주제를 하나 정하고 그 주제를 먼저 검수받아야 했다. 외부 자료는 가능한 사용하지 말고 수업에서 배운 내용으로만 만들어 써야 된다고 하는데 주제도 어려웠고 이제 배우기 시작한 분야에 대해 논쟁적인 제안을 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역시나, 내가 잡은 주제문들은 연달아 빠꾸를 받았다.
오늘도 조교와 미팅을 잡아놓고 골치를 썩이고 있었는데, 우연히 만난 동기에게 물어보니 자기는 통과했단다. 어떻게 그렇게 잘 생각을 해냈냐고 했더니 인터넷에서 이미 논쟁적인 내용을 찾아 적당히 비슷한 내용을 주제문으로 만들어 냈다고 했다. 이런. 내가 너무 멍청했다.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이건 요령도 아니고 그냥 멍청한 것 같다. 인터넷을 좀 찾아보고 새 주제문을 15분 만에 만들었는데 바로 통과했다. 아 아무래도 다음 학기는 조금 더 나아질 여지가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