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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대리 Dec 31. 2023

워싱턴 DC 4일 차_내셔널몰은 하루로는 한참 부족하지

미국생활 132일 차



어제 워싱턴 기념탑, 자연사 박물관, 토마스 제퍼슨 기념관만 간 게 아쉬워서 오늘 또 내셔널몰에 갔다. 내셔널 몰은 3일 잡아도 빠듯할 것 같다. 어제 주차하느라 고생한 걸 교훈 삼아 오늘은 대중교통을 타고 갔다. 친구가 출근 전 집 근처 지하철역까지 태워준 데다, 우리에게 루트 꿀팁까지 줬다.


내셔널몰 2일 차!


루트는 백악관 뒤에서 내려서, 백악관 - 내셔널 트리 (연방 정부의 크리스마스트리) - 베트남전 참전용사 메모리얼 - 링컨 메모리얼 - 한국전쟁 참전용사 메모리얼 - 이후 원하는 박물관이었다. 우리가 애초에 생각한 루트는 이동을 위한 루트가 많았는데, 이 루트는 중간에도 다 뭘 보면서 지나가서 버리는 시간이 없었다.


워싱턴의 지하철 역은 모두 똑같이 지하벙커처럼 생겼다. (진짜 지하벙커용으로 만든 건가) 그걸 보고 있자니, 갑자기 학생 때 워싱턴에 왔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와서 어디서 지냈는지도 기억이 안 나지만 대중교통과 도보로 오만데를 다 다녔고, 교포 남자애가 작업을 걸었던 기억이 있다. 어렸다 ㅎㅎ


백악관이야 사진만 몇 장 찍고 지나쳤는데, 의외로 내셔널 트리가 괜찮았다. 트리 자체는 허접했는데 주변에 주 별로 세워둔 작은 트리들이 볼 만했다. 각 주의 트리에는 어린이/ 학생들이 직접 그린 오나먼트들이 달려 있었다. 주로 그 주를 상징하는 것들이 그려져 있어서 구경하기 좋았다.


백악관 뒷편을 보니까 또 옛날 기억이 새록새록. 완전 잊고 있었는데


사막이 많은 애리조나는 선인장과 사막 그림이 지배적이었고, 알래스카는 곰과 물고기 그림들이 있었다. 뉴욕은 우리 집 앞을 지나가는 1호선 지하철 오나먼트도 있었고, 위스키로 유명한 켄터키는 양조장 풍경 오나먼트도 있었다. 반면에 (내 생각이지만) 진짜 그릴 게 없어 고심한 것처럼 보이는 주들도 있어서 그것도 귀여웠다.


가장 귀여웠던 켄터키 주의 트리
켄터키 주의 모든 오나먼트에 눈사람이 MC 마냥 있었다. 여기선 위스키들을 소개하고 있는 듯 ㅎㅎ



메모리얼 세 군데를 거치면서는 아이에게 전쟁의 개념과 미국 남북 전쟁에 대해 설명해 줬다. 전쟁과 노예의 개념이 아직 아이에겐 어렵고 슬픈 개념이지만 그래도 간단하게 말을 해줬다. 나도 평소 많이 생각지 않는 일들이라 섬세하게 균형을 잡으면서도 아주 쉽게 설명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앞으로 이런 걸 점점 더 많이 가르치게 될 텐데, 그에 앞서 나도 이런 이슈들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고 나만의 시선을 가지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어터졌다


처음 간 베트남 전쟁 메모리얼에서 아이에게 킥보드에서 내리도록 했더니, 한국 전쟁 메모리얼에서도 아이가 스스로 킥보드에서 내렸다. 한국 전쟁 메모리얼 근처 바위에서는 갑자기 요가를 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자기도 뭔가 느낌이 다르긴 한 모양이었다.


성씨와 돌림자를 공유하는 수많은 한국인들의 이름을 보며 아득해졌다. 수많은 친척들을 한번에 잃었을 유가족들이 떠올랐다. 평온하시길.


여행 내내 흐리거나 조금씩 비가 왔는데 오늘은 날씨가 엄청나게 좋았다. 햇빛도 적당히 따스하고 춥지도 않고 하늘도 맑았다. 그래서 아이가 내셔널몰의 산책로를 킥보드로 쌩쌩 달리는 걸 보고 있기만 해도 좋았다. 이동하는 그 시간 시간도 참 좋았다.


날씨가 너무너무너무 좋았다


중간에 피크닉 느낌으로 자주자주 쉬어 갔다. 싸 온 간식을 까먹으며 아이랑 장난을 치고, 청설모가 간식을 노려서 긴장하고, 조금 줄까 말까 고민하고. 모두 따뜻한 시간이었다. (아이는 결국 먹던 그래놀라 바를 청설모한테 내밀었다가 거의 덮쳐질 뻔했다. 그땐 좀 무서웠다 ㄷㄷ )


마지막에는 박물관으로 향했는데, 이미 4킬로를 걸었고 2킬로를 더 가야 해서 원래는 우버를 부를 생각이었지만 그냥 걸었다. 그만큼 좋았다. 아이도 (절반 이상은 밀어주는 킥보드에 실려 다니긴 했지만) 보채는 일 없이 잘 따라다녔다. 오히려 박물관 갈 즈음엔 우리가 지치고 아이는 혼자서 킥보드를 쌩쌩 탔다.


옆에 물도 있어서 쫓아가느라 바빴다. 이땐 거의 지침 ㅎㅎ


오늘 향한 박물관은 아프리칸 아메리칸 박물관이었다. 오바마 정부 때 생긴 박물관인데 여기 살던 동료가 추천을 해줘서 갔다. 여기쯤 오니 그래도 아이도 지쳐서 남편이 안으니 바로 잠이 들었다. 그 김에 우리도 카페테리아에 들러 점심을 간단히 사 먹으며 아이를 재웠다. 무릎에 누워 자는 아이를 보니 너도 따라다니느라 고생이 많다 싶었다 ㅎㅎ


아프리칸 아메리칸 박물관이라고 음식도 흑인 소울 푸드들을 팔았다. 남부식 버터밀크 치킨이나 풀드 포크 바비큐 같은. 우리는 바비큐에 사이드로 맥 앤 치즈/ 콜라드 그린을 하나 시켜 나눠 먹었는데, 전반적으로 달았지만 맛있었다 ㅎㅎ


이미 2시가 넘었고 저녁을 거하게 먹을 예정이라 이렇게만


아이를 데리고 박물관 구경도 했다. 아이를 데리고 있는데 조금이라도 전시를 볼 수 있다니 또 한 번 애가 컸다고 느꼈다. 이 박물관은 내내 논의가 이루어지다가 (2003년에 대통령/국회에 이 박물관의 건립이 제안됐는데, 제안서 이름이 “The time has come” (때가 됐다)였다.)


멋진 보고서 제목 ㅎㅎ


지상층은 문화에 대한 전시가 공간을 여유롭게 쓰면서 진행된 반면에, 지하로 들어가서도 불편한 동선으로 지하 4층까지 내려가면 거기서부터 역사 전시가 진행되었다. 어두운 지하에서 빽빽하게 구성된 전시를 보면서 공간 구성도 참 잘했다 싶었다. 노예로 끌려왔을 시기의 아프리칸 아메리칸들에 대해서는 유물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전시에 글이 꽤 많았다. 그걸 보완하려 했는지 접근성을 고려했는지 영상으로 진행되는 설명도 많았는데 덕분에 영상 좋아하는 아이도 잘 구경했다. 그새 나도 잘 구경했고 ㅎㅎ


널널한 지상층과 확실히 대비되던 지하층 전시


저녁에는 친구네 부부가 코리안 바비큐를 해줬다. 깻잎에 상추에 한국 소주에 쌈장에 집에서 만든 김치(!!)에 고추 부각 (!!!)까지. 호강했다.


먹다 찍힌 사진 밖에 없는게 아쉽다 ㅎㅎ


대화도 재밌었다. 친구 남편이 한국계 미국인에 한국에서 근무한 적 있는 외교관이라 얘기할 거리가 아주 많았다. 한국이 익명 서베이 하면 가장 비판적인 얘기가 나온다던지, 점심 약속의 중요성을 미국인들이 간과한다던지. 친구 남편은 위스키나 진에 관심이 많아서 술도 계속 새로운 게 나오고, 흥미롭고 즐거운 저녁이었다.


마지막엔 엊그제 다 못 본 홀리데이 무비를 마저 보며 마무리했다. 비급이지만 그 맛이 있었다. 연말다운 연말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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