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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대리 Jan 07. 2024

플렉스 데이

미국생활 139일 차



가끔 남편의 일기 제목을 베낄 때가 있는데 오늘도 마찬가지다. 남편의 오늘 일기 제목 '플렉스 데이' 보다 오늘을 잘 표현하는 단어는 없을 것 같다. (쓰고보니 남편 껀 ’플렉스‘ 였네)




한국에서야 맞벌이 부부지만 여기서는 무소득 학생 부부인데다, 학비에 맨해튼 생활비며 소비만 어마무시하게 하는 형편이라 우리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산다. 일주일에 한 번도 외식은커녕 커피조차 사 마시지 않는 날들이 부지기수다. 하지만 오늘은 드물게 플렉스를 했다.


맨해튼을 와서 한 번도 전망대를 간 적이 없었는데, 얼마 전에 뉴욕 여행을 왔던 친구가 유명한 전망대 EDGE 윗 층에 레스토랑이 있는데 좋다고 추천을 해줬다. 어차피 전망대도 정가가 30불이 넘는데 그럼 한 번 가볼 만하지 싶어서 오늘 점심에 남편과 가보았다.


식당 분위기부터 좋다


프라이빗하게 안내를 받아서 고층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더니, 고급 레스토랑이 하나 있었다. 분위기도 좋고 서비스도 좋고 무엇보다 뷰가 장난이 아니었다. 창 밖으로는 뉴욕의 고층 빌딩과 저 멀리 우리 눈높이에서 날아다니는 비행기들(!)이 있었다. 비행기가 내 눈높이에 있는 건 진짜 낯설었다. 살짝 아래를 보면 추운데 전망대에서 열심히 구경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살짝 위의 따뜻한 실내에서 좋은 서비스를 받으며 식사를 하는 기분을 느끼라고 전망대가 이렇게 잘 내려다보이게 식당을 만들었나 싶었다.


아래 슬쩍 보이는 전망대


식사는 그냥 보통이었다. 좋은 재료로 신경 써서 내오긴 했지만 특별히 맛이 있지는 않았다. 남편은 디저트가 제일 맛있었다고 했다 ㅎㅎ 하지만 뷰가 워낙 압도적이라서 올 만 했다. 나는 식당을 고를 때 어떤 요인 보다도 맛을 중시하는 편인데, 비록 내 참치 스테이크는 못 다 먹고 남편과 바꾸기는 했어도 여기는 워낙 뷰가 독보적이었다. 남편과 여유롭게 서비스받으며 풍경 보며 얘기를 나누는 것도 좋았다.


에피타이저 굴과 디저트 시나몬 토스트는 맛있었다. 레몬 넉넉하게 주고 짤 때 씨앗 나오지 말라고 거즈로 싼 센스도 좋았다


아이를 하원하고는 외삼촌을 만났다. 외삼촌은 오래 뉴저지에 사시다가 한국으로 들어가셨는데, 여기에 지인도 많고 사촌들도 미국에 살고 있어서 종종 나오신다고 했다.


내가 깜빡하고 겨울 롱패딩을 안 가지고 왔는데 사긴 아깝고 해서 내내 남편 걸 후줄근하게 빌려 입고 있었는데, (어째서 남편 패딩은 두 개 다 챙겨 넣고 내 건 하나도 안 챙겨 온 건지 모르겠다.) 외삼촌이 가져다주셨다.


짐을 가져다주신 것만 해도 감사했는데, 렌터카로 플러싱 구경을 시켜주고 저녁까지 사주셨다. 플러싱은 워낙 한국인들이 많이 살았다고 해서 (지금은 많이 빠지고 중국인들이 그 빈자리를 차지했다고 한다) 한번쯤은 가볼까 싶었는데, 대중교통으로는 편도로 1시간 넘게 걸려서 간 적이 없었다. 외삼촌 차를 타고 편하게 가니 30분 조금 안 걸렸다. 맨해튼 주변은 워낙 길이 복잡해서 우리는 차를 빌려도 감히 이 쪽으로 올 생각은 못했을 텐데, 이 주변에서 워낙 오래 산 외삼촌은 전문가처럼 운전을 해서 편하게 왔다.


잘 안보이지만 간판들이 다 중국어다. 간판들이 다 한국어인 곳도 있었다



처음에는 잠시 퀸즈 뮤지엄이라는 곳에 들렀다. 진짜 의아함이 가득 생기는 뮤지엄이었다. 엄청 넓은 부지에 커다란 뮤지엄이 있었는데, 전시 작품도 별로 없고 그냥 엄청 넓었다. 운영하는 측에서도 그걸 아는지, 그냥 로비에 엄청 드문드문 편안한 소파를 두고 공간을 즐길 수 있게 만들어 두었다. 이거야말로 땅의 플렉스였다. 땅도 넓고 문화적으로도 우리나라 보다 여유가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가능한 뮤지엄이었다. 전시보다 그 공간 자체가 엄청 인상 깊었다.


덩달아 여유로운 딸내미


다음에는 한양마트라는 이름의 한인마트를 갔다. 집 근처에 H마트가 있기는 하지만 사이즈가 작고 미국 H마트 중 가장 비싼 곳이라고 소문이 난 곳인데, 여기는 가격도 괜찮고 물건도 진짜 많았다. 춘장에 갓김치, 수십 가지의 두유까지 파는 걸 보니 한국에 파는 건 다 파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조금 나이 든 분들이 많이 오시는지, 품목 구성이나 분위기는 읍내에 가장 큰 마트 같은 느낌이었다. 이번주 화요일에 채워놓은 냉장고가 아직까지 꽉 차서 몇 개 사질 못했는데, 그래도 구경하는 게 재밌었다.


분위기도 읍내 마트 ㅎㅎ


다음으로는 함지박 식당이라는 코리안 바비큐 식당에 갔다. 그러고 보니 뉴욕 와서 4달 만에 한국 식당은 처음 가봤다. 한국식 숯과 밑반찬들이 반가웠다. 아이는 마블링이 있는 한국식 구이용 소고기를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대박!"이라고 외쳐서 종업원들이 웃었다. 소고기 3가지 세트에 된장찌개, 시래기 순댓국을 시켜 먹었다. 순댓국은 집에서 만들 수가 없어서 내내 먹고 싶었는데 덕분에 잘 먹었다. 아이도 나물도 소고기도 주는 대로 잘 받아먹었다. 엄마가 간신히 해주는 채소요리보다 가게 나물이 맛있겠지... ㅎㅎ 잘 먹는 걸 보니 괜히 미안했다.


인건비 비싼 미국에서 구워주는 소고기라니


가기 전에 외삼촌이 구글 평점이나 리뷰를 보고는 예전에는 여기가 괜찮았는데 좀 변했을 수도 있겠다고 걱정을 하셨는데, 식사 중간에 테이블에 바퀴벌레가 한 마리 기어 다닌 것 말고는 괜찮았다. 바퀴벌레야 여기서는 생활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돌아올 때도 외삼촌이 태워주는 차로 편하게 집에 왔다.


순댓국도 특별한 맛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먹으니 너무 반가웠다


집에 와서 외삼촌이 전해 준 엄마가 보낸 캐리어를 여니, 아이 용품들이 터져 나왔다. 분명 내 롱패딩과 필요한 생활용품을 받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트렁크의 대부분이 아이 스티커나 장신구, 옷, 장난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ㅎㅎ 아이는 신이 나서 행복하다고 했고, 그걸 보는 나도 행복했다. 플렉스 한 날이었고, (플렉스 한 날이 반드시 행복한 날은 아니지만 오늘만큼은) 행복한 날이었다.


남편은 플러싱 창문이 한국이랑 같은 옆으로 여는 형식이라 (여긴 보통 위로 연다) 한국이랑 더 비슷한 느낌이라고 했다. 이런건 언제 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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