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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대리 Apr 23. 2024

다이내믹한 유월절(Passover)_240422

미국생활 249일 차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월절 (Passover) 같은 건 내 머릿속에 없는 단어였다. Passover라는 말을 듣고는 사전을 검색해봐야 했다. 물론 유월절이라고 나와서 다시 인터넷 검색을 해봐야 했고.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벗어난 걸 기념하는 유대교 최대 명절 중 하나라고 했다. 그렇게 갓 유월절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그러고 나서 처음 보낸 오늘 유월절은 아주 다이내믹했다.


일단 학교에서 난리가 났다. 얼마 전에도 썼지만, 우리 학교는 얼마 전에 친 팔레스타인 학생들이 학교 잔디밭에 텐트를 설치하면서 이를 퇴거시키기 위해 경찰을 캠퍼스 내로 불렀다. 이후 100 명 넘는 학생들을 체포되면서 갈등이 극화되어가고 있다.


이후로 중동계가 아닌 학생들도 사건에 관심을 갖고 일부 지지를 하기 시작했고, 학교 다른 잔디밭에 텐트가 들어섰다. 학교 측은 내내 강경한 입장을 취했고, 오늘은 심지어 아침에 갑자기 오늘 전 수업이 온라인으로 전환됐다.


온라인 수업이라도 학교 도서관에서 들을까 해서 캠퍼스 근처에 가봤는데, 들어갈 상태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요즘 보안 요원도 2배로 늘어나고 캠퍼스 근처에 경찰들도 포진했는데, 오늘은 경찰들이 포진한 정도가 아니었다. 학교 내 몇 블록에 맨해튼 경찰이 다 모인 것 같았다. 학교가 보이지도 않는 두 애비뉴 옆에도 스트릿마다 경찰들이 우르르 서있었다. 알고 보니 갈등이 극화되고 있는 와중 유월절이 되면서 혹시 더 양상이 극단으로 치달을까 봐 대비한 것이라고 했다.


경찰이 없는 곳에는 언론들이…


그리고 진짜로 그랬다. 평소에는 메인 교문 한 군데 밖에서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는 비 학생 시위대들이 (요즘 학교에는 학생과 교직원만 출입이 가능하다) 있었는데, 이제는 쪽문들에도 친 팔레스타인 군중이나 친 이스라엘 군중들이 모여 시위를 하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학교 어느 도서관도 차분한 환경이 못 될 것 같아, 그냥 돌아 나왔다.


학생들이 잡혀가고 있는데 교수들은 뭐 하나 싶었는데, 오늘 드디어 교수들도 시위에 나섰다.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 한쪽의 편을 들기보다 최근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에 대한 조처들 (체포, 학교 출입 금지 등)을 반대하는 시위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 학교와 시위대 간의 양상이 너무 극단으로 치닫고 있어서, 이 또한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교직원 시위대와 멀리 보이는 새로 지어진 텐트존


요즘 갈등이 심화되면서 여러 가지 여파가 내 삶에 직접적으로 여파를 미친다. 많은 동기들이 격앙된 상태고, 학교 출입이 자유롭지 않다. 오늘은 갑자기 수업이 온라인으로 바뀌면서, 오늘 하기로 한 파이널 과제 발표도 밀렸다. (교수가 미룰 수 있는 선택권을 주었다.) 학교 바로 근처에 사는 입장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집 근처에 대치하고 있는 것만 해도 좀 긴장된다. 우리 집은 건물 안 쪽이라 사이렌 소리가 잘 안 들리는데, 관련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 며칠 사이에는 밤에도 상시로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학교 길 건너편, 저 무리가 거의 다 경찰이다. 학교 쪽에는 더 많지만 시위대와 경찰로 얽혀 있어서 사진을 찍고 말고 할 수도 없다.


낮에는 유월절의 격랑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다가, 4시부터는 유월절 식사에 참여했다 (!!) 친하게 지내는 딸내미 친구네 가족이 이번에도 초대해 주었다. 이 집은 엄마(페이)가 유대인인데 평소 딱히 코셔를 지키거나 하진 않는 느슨한 유대인이고, 요새 워낙 시끄러워서 유월절을 그냥 지나갈까 생각도 했지만 전통을 기리는 의미에서 그냥 하기로 했다고 한다. 고맙게도 우리 가족만 특별히 초대해 주었다.


노예에서 풀려난 유대인들은 급하게 도망가느라 부풀린 빵을 못 먹었기 때문에, 그 걸 기념해서 유월절에는 일반적인 빵이나 케이크는 안 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원래는 바람떡을 가져가려고 준비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보다 제한이 훨씬 많았다. 쌀로 만든 것도 안되고, 공장에서 생산한 음식 중에서도 passover 인증이 없으면 못 먹는다고 했다. 보통 유대인들의 음식 인증인 코셔 인증이 아니라 passover 인증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알아보고 피해 가려했지만 뭔가 엄청 복잡했다. 간신히 과일은 Passover 인증이 없다는 걸 알아내서, 모둠 과일 플래터 하나를 사갔다.


제일 오른쪽 아래가 유월절 코셔 인증, 제일 왼쪽 위에가 일반 코셔 인증 마크다


페이가 어릴 때는 유월절 행사를 2시간씩 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초고속으로 20분 만에 해치웠다. 페이도 느슨한 유대인인 데다 여기서 유일한 유대인이고, 일단 옆에서 5살, 4살, 2살 아이들이 정신없이 굴어 뭘 할 환경도 아니었다. ㅎㅎ 식탁 가운데에 유월절 용 접시가 놓여있고, lettuce/ 양뼈 (대신 닭뼈)/ 파슬리/ 구운 계란 등이 있었다.


이게 전용 플래터인 모양이었다.


초를 켜고, 엄청 단 concord 와인을 한 모금 씩 마시고, 손을 씻고, 쓴 푸른 잎채소를 소금물에 찍어먹고 (고난을 기억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옛 역사 이야기를 하고, 노래를 하는 등의 순서가 이어졌다. 아이들은 대개 관심이 없고 자기들끼리 놀았지만, 마른 크래커를 부숴서 숨긴 후 마른 크래커를 하나씩 입에 물려주자 조용해졌다. 식사 후에는 그걸 찾는 순서가 있어서 찾아낸 후 용돈도 1불씩 받고 ㅎㅎ


유월절 와인. 나도 입만 대봤다. 알콜이 들어간 주스였다 ㅎㅎ


음식도 여러 가질 먹었다. 우선 와인 (아이들도 같은 품종의 포도로 만든 주스)를 한 모금씩 한 상태에서, 마른 크래커와 사과와 견과류를 와인 소스에 섞은 것을 함께 먹고, 마초볼 수프도 먹고 (치킨 수프에 밀가루와 계란, 오일 등을 반죽해 만든 볼을 넣어 익힌 것),



메인으로 소고기를 넣은 양배추 쌈에 토마토소스를 얹어 익힌 요리를 먹었다.


유대 식료품점에서 산 건데 안에 쌀이 들어있다며 페이가 당황해했다 ㅎㅎ


마지막에는 코코넛 가루로 만든 쿠키도 먹고.


쫀득하고 달콤했다!


우리를 위해 유월절 음식은 아니지만 유대 전통 음식인 fish cake도 준비해서 아주 조심스럽게 (‘유대인들은 익숙한 음식이라 먹지만 입에 안 맞으면 먹지 마세요’) 건넸는데, 그냥 우리나라 어묵의 삶은 버전이라 재밌게 먹었다. 맛은 똑같고 조리 방법 차이에 따른 식감 차이만 있었다. 홀스래디쉬랑 같이 먹는데, 그것도 간장+고추냉이 소스에 함께 먹는 느낌이었다.


오른쪽 위 롤케익처럼 생긴게 피쉬케익이다.


약식으로 진행했다고는 하지만, 우리도 덕분에 유대 문화를 잔뜩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집 덕분에 핼러윈, 유대교 크리스마스도 잘 경험했는데, 유월절까지 경험할 수 있었다. 정말 고맙다. 그나마 딸내미가 열일을 해줘서 조금 마음이 낫다. 이 집은 첫째 아이가 딸내미와 같은 반인데, 벌써부터 숫자를 읽고 계산을 하는 등 특정 능력은 뛰어난데 사회성이 조금 떨어지는 경향이 있어 고민이 많다. 하지만 딸내미가 둘이 있을 때 잘 챙겨가며 놀아주고, 이 집 동생도 잘 돌봐줘서 이 집에서 더 좋아하고 자주 초대해 주는 것 같다. (처음에 딸내미가 영어 못 할 때부터 이 집에서 손 내밀어 주긴 했지만 ㅎㅎ) 마지막에는 남는 음식도 싸 가려나 물어봐줘서, 염치 불구하고 이 집에서 만든 마초볼 수프를 좀 얻어왔다. 양배추롤은 산 거지만 이건 만든 거라 어디서 다시 먹을 수 없을 것 같아서. 통을 돌려주면서 우리나라 음식을 하나 만들어 채워 넣어줘야겠다.


내 인생에 유월절이 이렇게 다이내믹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내가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살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난다.





+) 페이네서 돌아오면서 나는 재밌는 경험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은 전혀 다른 얘기를 꺼냈다. 저녁 직전에 (내가 수업 간 사이) 그 집 아이와 플레이 데이트 했던 얘기였다. 오랜만에 새로운 놀이터로 갔는데, 새로운 기구들이 있는 만큼 거기에 대해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여기서 살면서 일상에서 계속 긴장감을 갖는 게 좀 피곤하다고 했다.


방금 같은 경험을 하고 왔지만 그 감상보다는 저 감상이 나오는 걸 보며 역시 많이 다르구나 싶었다. 새로운 것에 대해 관심이 크게 없고 컴포트존이 중요한 남편에게 지금의 생활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 따라와서 고생이 많다. 그래도 요새 한국 보다 공기 질이 훨씬 좋은 이곳의 봄을 보며, 뉴욕이 좋은 것도 있구나 생각하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다.


여긴 흐린 날은 많아도 미세 먼지는 없다. 그러다보니 오늘처럼 간혹 맑은 날은 진짜 햇살이 찬란하다.


나와 딸내미뿐 아니라 남편에게도 이곳 생활이 좀 더 의미가 있었음 하는 건 내 과욕일까. 그나마 여기서 있으면서 달리기에 더 흥미를 붙여서 마라톤까지 나가는 게 진짜 다행이다. 같이 마라톤을 할 친구가 마침 같은 기간 와 있었던 것도 행운이고.


아이 봄방학이 시작되었다. 남편이 힘들어할 게 눈에 뻔해서 모든 과제와 시험을 미루고 수업 시간 외에는 집에 붙어서 함께 아이를 챙겼다. (다른 유학생 부모들은 학기말이라 다들 당연히 도서관 콕인데 ㅎㅎ)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하루 종일 뭔가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가끔은 허탈도 하지만, 그래도 진짜 감사하게 생각할 일이다. 어쨌건 봄방학 동안 남편을 잘 돌봐야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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