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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뉴욕 일기

졸업식_240510

미국생활 267일 차

by 솜대리



졸업식을 했다. 아직 여름학기가 남았지만 식을 하고 나니 진짜 졸업한 느낌이다. 나는 상당히 실용주의인데도 이런 느낌을 받는 걸 보면, 확실히 형식이라는 게 중요하긴 한 것 같다. 여기 와서 핼러윈, 크리스마스, 부활절을 즐기면서 한국 가서도 일상 속에서 더 많은 이벤트를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결국 같은 맥락이고.


급 장소가 변경되는 바람에, 좀 열악한 상황이긴 했지만


미국 사람들이 실용적이라고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한국사람들이 훨씬 그런 것 같다. 미국 사람들이랑 일하다 보면 우리는 이들이 말만 번지르르하다고 느낄 때가 있는 반면 미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이 너무 힘들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미국 사람들이 훨씬 일상에서 이벤트를 많이 가져가는 것도 그렇고.


이런 미국 문화가 딱히 내 스타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와서 겪어보니 그 문화의 장점들도 느낀다. 엄마라 그런지, 어떻게 하면 내 아이들이 두 문화의 장점을 모두 경험하며 살 수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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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도 적었지만, 캠퍼스 상황 때문에 졸업식은 마지막까지 시간과 장소를 바꾸고 일부 취소되고 엉망진창이었다. 당일에도 졸업생들에게도 제대로 된 식 가이드가 없어서 다들 좌충우돌했다. 협소한 곳에서 졸업식을 진행하면서 인당 초대할 수 있는 게스트 숫자가 바뀌어서 당일 아침까지 모두 패닉이었고.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괜찮았다.


이 좁은 계단에서 단체 사진 찍어보려다 대 실패 ㅋㅋ


게스트가 많지 않은 인터내셔널 학생들이 남는 티켓을 나눠주면서 대부분의 게스트들이 졸업식장에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고, 요즘 시위 때문에 좀 이슈가 되고 있지만 사실 지구를 걱정하는 모범생 집단인동기들은 갑자기 듣는 가이드에도 착착 잘 움직였다.


시위에 참석하고 체포되었던 동기는 졸업 가운 뒤에 각종 구호를 붙여 나타났지만, 다른 동기들의 걱정과 달리 다행히 계획대로 졸업식 학생 대표 연사가 될 수 있었다. 원래 커뮤니케이션 쪽 커리어가 있는 동기는 학생 연설에서도 선을 잘 탔고, 학장은 그 연설 전후로 딱히 요즘 사태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 없이 자연스레 넘어갔다. (사전에 학생처 쪽에서 “서로의 졸업식을 존중하자” 같은 간접적인 당부를 여러 차례 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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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졸업식에서 입에 발린 말들이 난무하는 연설을 듣고, ‘우리 아내는 슈퍼 히어로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안 그래도 졸업식은 전체적으로 우쭈쭈 하는 분위기인 데다가, 우리는 기후 전공자들이라 더 그런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졸업식에서는 이 정도로 얘기할 수 있지’ 정도의 마음으로 듣다가도, 그래도 기후 전공자는 다른 이들을 설득할 일이 많은 만큼 조금 더 내 지식이나 하는 일에 자신감을 가지고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할라나 싶었다. (며칠 전 한 수업의 게스트 스피커가 ‘우리는 조금 더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그게 어렵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라는 얘기를 하는 걸 들은 후로 내내 그 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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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내미는 2시간 여에 걸친 졸업식을 동영상으로 잘 버텼다. 남편은 내 지시대로 ㅎㅎ 열심히 내 사진을 찍어줬고, 부모님도 한국에서 졸업식 생중계를 무사히 보았다. 졸업식 종료 후 리셉션에서는 지도 교수님, 가까운 동기들과 그 가족들과 얘기하며 1시간 정도를 머물렀다. 조명도 어두웠고 핸드폰 카메라에 딸내미랑 치대다 보니, 가족사진을 제대로 못 남긴 건 좀 아쉽지만 기대보다 훨씬 괜찮은 졸업식이었다.


아이고 내 사랑


취소된 전체 졸업식이 못내 아쉽다. 컬럼비아 졸업식은 중간에 ‘Empire state of mine’라는 노래를 부르는 걸로 유명하다. 그 가사를 외울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아니 학교가 무슨 권리로 마음대로 남의 졸업식을 취소하나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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