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생활 276일 차
오늘은 집 근처에서 열리는 어린이 축제를 가기로 했다. 어제 내가 무리한 만큼 남편이 혼자 딸내미를 데리고 간다고 했지만, 남편의 컨디션을 보니 아직 그럴만한 상태가 아니어서 일단 같이 간다고 했다. 일단 가서 상황 보고 괜찮겠으면 근처 카페 등에서 머무르면서, 필요하면 교대를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가보니 교대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 ㅋㅋ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한국을 느꼈다. 미국은 땅덩어리가 넒어서 그런지 어딜 가도 한국보다 여유롭다. 미국에서 제일 번잡하다는 맨해튼에 살고 있지만, (타임스퀘어를 제외하고는)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같으면 미어터지고도 남을 어린이 박물관이나 행사도 우리나라보단 인구밀도가 낮다. 하지만 여긴 달랐다. 놀이터 입구에 서 있는 수십대의 유모차부터 나를 압도하더니, 들어가자마자 여기저기 끝도 없이 늘어선 줄들이 보였다. 이런.
뭘 할 때마다 티켓을 내야 하는데, 그 티켓 값이 저렴한 것도 아니었다. 에어바운스 하나 타는데 10달러, 무제한 티켓이 40달러였다. 그런데도 줄이 엄청났고, 기구마다 ‘어디에서 스폰서 함’이라고 붙어있었다. 에어바운스 미끄럼틀 한번 내려오는데 10달러인데 이게 스폰서한 가격인가. ㅎㅎ 뉴욕 물가란.
무제한 티켓을 샀지만 자칫하다간 줄 서다 아이가 지쳐서 나가떨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분업 시스템을 도입했다. 번갈아가며 줄을 서거나 점심을 사 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가족도 다들 비슷한 시스템이었다.
마지막까지 버틸 생각이었는데 3시간쯤 지나서 - 행사 종료를 1시간 안 남기고 즈음에는 서 있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남편도 피곤해하는데 미안하지만 먼저 자리를 뜨….. 려고 했지만 뜨지 못했다. 진짜 움직이기도 힘들어서 근처 벤치에 하염없이 앉아 있다가, 공원을 간신히 벗어났는데 집까지 못 가겠어서 또 근처 카페에 앉아 쉬었다.
행사 종료 시간까지 4시간을 꽉 채워 논 딸내미는 남편한테 안겨서 순식간에 잠들었다고 했다. 30분쯤 재우고 내가 있는 곳으로 온 남편과 딸내미는 다시 30분쯤 쉬다가 같이 집으로 향했다. 뻗은 나 대신 남편이 저녁으로 파스타도 하고.
남편은 토요일에 독박을 하고도 따라가 준 나한테 고마워했고, 나는 후반부에 마지막까지 힘을 짜내 달려준 남편한테 고마웠다. 아이는 엄마 아빠의 컨디션 저하를 느낄 새도 없이 하루를 잘 보냈다. 줄만 서다 지칠 일도 없었고, 점심도 잘 먹었고.
진짜로 함께 육아하는 남편이라서 육아관이 부딪혀 어지간히 많이 싸우고, 졸업식 때도 꽃 살 생각 같은 건 못하는 남편이지만, 이렇게 덕을 볼 때도 많다. 아무래도 이 결혼은 잘한 것 같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