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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뉴욕 일기

예능을 보며 울적해지는 시기_240907

미국생활 383일 차

by 솜대리



둘째 출산 후에는 우울증이 찾아올 여력도 없다 싶었는데, 역시나 산후우울증은 여력이 없다고 안 찾아오고 그런 건 아니었다.


요즘 ‘신인가수 조정석’이라는 넷플릭스 예능을 보고 있다. 조정석은 뮤지컬 배우도 오래 하고, OST로 음원 차트 1위도 하고, 클래식 기타로 대학 가려고 삼수를 했을 만큼 음악에 진심인 배우인데, 이 프로그램을 통해 1집을 낸다. 오랫동안 꿈꿔온 일을 하게 된 조정석은 프로그램 내내 반짝반짝한다.


국민 호감 배우가 진심으로 꿈을 쫓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잘 기획된 예능이었다! 프로그램 자체는 ㅎㅎ


안 그래도 호감이었던 인물이 진짜로 반짝이는 모습은 보고만 있어도 에너지가 차오를 텐데, 나는 보면 볼수록 울적해졌다. 그 사람의 반짝이는 모습과 3주 가까이 집에만 칩거하고 있고, 아직 몸 회복도 차마 다 되지 않은 내 모습이 너무 대비되어 보였다. 우리는 친정 엄마의 도움을 받고 있는 이 시기에도 하루하루를 살아내기 바쁜데, 저기서는 꿈을 얘기하고 그 꿈을 서로 응원하고 격려하고 있었다. 아내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노래를 쓰고, 그 노래를 듣고 여자친구를 생각하고 하는 모습은, 이 시기가 지나도 우리 부부한테는 없을 모습이라 괴리감이 느껴졌다.


진짜 괜찮았는데 정말 한 순간이다. 어젯밤 꿈에는 누군가 내 어깨를 토닥여줬는데, 꿈에서 그 사람이 딱히 호감도 아니었고 어렴풋이 꿈인 걸 인지하고 있었는데도 그 손길이 고마워 울컥했다.


다행히 오늘은 좀 낫다. 생각해 보면 어젯밤에 둘째가 처음으로 3시간 간격으로 먹으며 쭉 자준게 도움이 되었다. 고생하는 엄마가 오래간만에 놀러 나간 것도 마음이 편하고. 그런데 이렇게 한순간에 괜찮아지는 건 또 한순간에 안 좋아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엄마는 뉴욕 자연사 박물관행. 자연사 박물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센트럴 파크가 모두 도보거리인데 그걸 못 즐기고 있다니!


첫째 때 경험이 있어서 산후풍도 산후우울증도 나름 피해 가보려고 했는데, 둘 다 다른 루트로 찾아왔다. 산후풍도 산후우울증도 참 무섭다. 그렇게 보면 우리나라도 산후우울증에 대해 좀 더 심각하게 다루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는 산후풍에 대해서는 경각심이 높아서 한 여름에도 산후 조리원에는 에어컨을 틀지 않고, 계절 상관없이 산모가 맨살을 드러내면 다들 식겁을 하는데 (그게 정말 맞는 방향인가는 차치하더라도 그만큼 사회적으로 신경을 많이 쓴다는 뜻이니), 산후우울증은 경각심이 그에 못 미치는 것 같다. 다들 알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딱히 뭘 하진 않는 정도.


하지만 여기는 오히려 산후우울증을 더 신경 쓰는 느낌마저 든다. (산후풍이라는 개념은 특별히 없는 것 같고, 그냥 ‘출산 후 회복’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 같다. 간간히 동양의 산후풍 개념에 대해 신기하게 얘기하는 건 본 적이 있다.) 병원에서 퇴원할 때는 간호사가 산후 우울증에 대해 특별히 신신당부를 했다. 산후 우울증은 애 낳고 1년 있다가 올 수도 있다고. 혹시 힘들어지면 언제든 911을 부르라고. 산후 검진에서도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게 우울감이었다. 나는 나름 긍정적으로 체크한 것 같은데 우울증이 있다며 정신과 리스트를 주며 바로 상담을 받아보라고 했다.


다리만 나아도 훨씬 기분이 나을 것 같은데. 오늘은 우울감 극복 차원에서 딱 400미터 정도 걸어봤다


가끔은 ‘New mom club’이라고 해서, 갓 아기를 낳은 엄마들의 소셜 모임 같은 것도 한다. 그런 것도 (조리원 동기처럼) 산후 우울증 극복에 큰 도움이 될 텐데, 우리나라에서는 애 낳고 그 정도 시기에는 잘 외출하지 않으니 바로 적용하긴 힘들 것 같지만.


합계 출산율 0.7이 깨지네 마네 하는 우리나라라 산후 우울증 말고도 신경 쓸 게 많긴 하겠지만,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 중 하나인 만큼 우리나라에도 산후우울증에 좀 더 신경을 써주면 좋을 것 같다. 일단은 나부터 잘 극복해 나가야겠지만. (이런 식으로 객관화해 생각해 보는 것도 감정 극복에 도움이 된다.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 같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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