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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뉴욕 일기

주류가 뭐길래_240909

미국생활 385일 차

by 솜대리


어제는 산후 검진을 갔다. 사전에 보험 적용이 됨을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도 (공식적으로 내 보험 자체는 만료됐고 일부 보장만 연장되었기 때문에) 역시나 내내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 진료 접수할 때부터 몇 번을 설명해야 했고, 진료 시 의사도 ‘애 낳은 지 얼마나 됐냐 (기존 보험으로 산후 6주까지 산후 검진커버가 된다.), 왜 저소득층 보험으로 바꿨냐, 이번까지는 기존 보험으로 커버가 되지만 다음 산후 검진은 볼 수가 없다. 물리치료사를 만나면 좋겠지만 아마 저소득층 보험이라 어려울 거다’ 등등의 얘기를 했다.


Screenshot 2024-09-10 at 12.13.55 PM.png 외국인이지만 임산부라 들 수 있었던 저소득층 보험. 다니는 병원들은 이 보험을 볼 때 마다 자기네는 이거 안 받는다고 난색을 표했다 ㅎㅎ 국민건강보험이 그립다.


출산 직전 학생보험이 종료되면서부터 내내 경험했던 일들이지만, 컨디션도 안 좋고 울적한 상태라 그런지 부쩍 더 우울해졌다. 다리가 아프지 않았으면 괜찮았을 텐데, 아픈데 제대로 병원에 가기도 힘들다는 생각이 나를 힘들게 했다. 진짜 아프면 한국에 비행기 타고 가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 여기 와서 처음 든 생각이다. 미국에 와서도 학생이라는 신분과 그에 따른 제도들이 나를 나름 보장해 줬었는데, 그게 종료된 후 나는 여기서 제도권 밖의 사람이다. 제도권 밖이 되니 1차 병원 한번 갈 때도 엄청 신경을 써야 한다. 이럴 때는 주류로 살고 싶다. 제도권 안에서 살고 싶고, 보통으로 살고 싶다.


한 번도 한국에선 해본 적 없는 생각이다. 한국에서는 오히려 나만의 색깔을 가지고 살고 싶어 했다. 한 번도 주류 혹은 보통의 범주에서 제대로 벗어나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 간단히 생각했던 것 같다. 나만의 색깔을 가진다는 것도 사회의 안전망과 주어진 틀 안에서의 얘기인 것 같다. 그러지 못했을 때 삶은 너무나도 피곤하다. 처음 미국에 올 때 남편 블로그에 누군가가 ‘미국에서 주류가 될 수 있으면, 남아서 사는 것도 괜찮아요’라는 댓글을 남겼다. ‘주류가 될 수 있으면’이라는 조건문이 떠오른다. 김보통 작가의 다른 책 내용도 생각난다. 뭐 하나 결정할 때마다 지나치게 고민하던 아버지가 예전에는 싫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가진 게 별로 없어서 어쩔 수가 없었던 것 같다고 했던. 작가의 그 기억과 ‘보통’이라는 작가의 필명이 교차되어 떠오른다. 그나마 나는 한국에 돌아가면 해결된다는 보장이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는 어떨까 싶다.


주류라는 게 꼭 있어야 할까. ESG를 얘기할 때 ‘다양성’도 굉장히 중요한 한 축이다. 다른 인종, 성적 취향, 각종 상황도 포용하고 나아가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 이게 실행이 된 사회는 주류/ 비주류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모두가 평등해지는, 모두가 보통의 삶을 살 수 있는 사회일 거다. 그런데 가능할까.


고등학교 때 사회는 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배웠다. 루소가 이 사회 계약론을 얘기하고, 이게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는 사회학 전공이 아니라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이 이론을 믿는다. 사회 구성원이라면 법을 지키고, 세금을 내고 하는 어느 정도의 틀을 지켜야 한다. 이 틀을 지키는 사람들을 주류로 삼았던 건데, 이 틀이 다소 타이트하게 짜여 있어서 사회에 책임과 의무를 다하더라도 개인의 인종이나 취향, 상황 등으로 주류/ 비주류를 구분했고, 다양성의 추구라는 건 그 틀을 조금 더 느슨하게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사회가 유지되려면 어느 정도의 규범은 있어야겠지만, 아직은 넓혀나갈 여지가 아주 많아 보인다.


Screenshot 2024-09-10 at 12.18.57 PM.png 이 글에 넣을 사진이 없어 찾다가 발견한 김보통 작가 인터뷰. '원하는 일을 하는 게 보통의 기준이 되었으면'. 완전 공감한다. (출처: 한겨례)


예전의 내가 그랬듯 ‘나만의 색깔 가지기’가 화두인 요즘, 다양성과 포용을 갖추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걸 보장해 주는 곳을 찾아 나갈 거다. 나는 조금 다른 의미의 비주류이긴 하지만, 이렇게 주류의 범주를 늘려나가는 데 대 찬성이다. 미국에 와서 ESG, 사회 분야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낀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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