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의 감상
좋아하는 정치인이 누구예요?
정치는 잘 모르지만, 작가로서 유시민을 좋아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앞으로의 행보를 지켜보고 싶습니다.
십 년 전, 한 기업의 면접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인턴 과정을 마쳤고, 이미 신입사원 채용이 거의 내정된 상황이었다. 이 면접까지 왔으면, 큰 결격 사유를 새로이 발견하지 않는 이상 무조건 합격이라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같은 면접을 본 다른 몇 명도 불합격을 했다. 함께 불합격한 인턴 동기들과 앞뒤를 맞춰보니 답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내가 유시민의 이름을 꺼낸 순간, 나는 큰 결격 사유를 가진 사람이 된 것이었다.
화가 났다. 이제까지 나는 내 의견을 조리 있게 잘 표현하라고 교육받아왔다. 말 한번 잘 못했다가 큰 일 나는 사회였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세상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이게 대체 뭔가. 더 당황스러운 건 선배들이나 어른들의 반응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미리 조언을 해줄걸' 하며 안타까워했다. 불합리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고. 혼자 씩씩대면서 그런 회사 안 가고 말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십 년이 지났다. 다행히 더 원했던 회사에 들어왔고 어느 정도의 사회 경험도 쌓였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와 같은 후배를 만난다면 어떨까. 조금은 분노하겠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후배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앞설지도 모르겠다. 십 년간 경험한 사회는 '원래' 불합리했고, 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영리하게 행동해야 했다.
그러다가 어제, 뒤늦게 대화의 희열 유시민 편을 보았다. 프로그램은 학생운동 시절부터 그의 삶을 쭈욱 훑어나갔다. 학생 운동 이야기는 항상 고통스럽다. 그 시대의 상황도 그렇지만, 이후 벌어질 일들을 알면서도 학생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가슴 아팠다.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유시민은 군인들이 학교로 곧 밀어닥칠 걸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남아있다가 붙잡혔고, 그렇게 잡혀 두 달간 고문을 받은 후에도 '똑같은 상황이 온다면 또 그럴 겁니까?' 하는 재판장의 질문에 '똑같은 순간이 온다면 똑같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답하고 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몇 번을 들어도 나는 결코 못할 것 같은 일들인데. 그도 결코 될 거라 생각해서 한 일은 아니라고 한다. 3분 시위하면 3년 옥살이하고, 맨날 시위해도 신문에 한 번 나지 않는 상황에서 민주화는 결코 될 것 같지 않았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있으면 너무 못나 보여서, 못 이기기 때문에 외면해 버리면 너무 비참해서,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 삶에 비참함은 안 느끼고 살았다고. 그건 꽤 괜찮았다고.
소름이 돋았다. 나는 저 나이가 돼서 저런 얘기를 당당하게 할 수 있을까. 당장 지금에라도 당당하게 저리 이야기할 수 있을까.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말로,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나의 비천함과 비겁함을 합리화하고 있진 않았을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 정도는 참아야지', '내 탓도 아닌데 어쩌겠어', '어쩔 수 없잖아' 하는 순간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물론 유시민이 경험한 것들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사소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사소했기 때문에 위험한게 아니었을까. 물 스미듯 비겁함에 물들어 버린 건 아닐까.
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의 그 책을 다시 한번 꺼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