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의 감상
김보통 작가를 좋아한다. 암환자를 다룬 웹툰 '아만자'로 유명한 분이지만, 나는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라는 수필집으로 이 분을 처음 알게 되었다. 정말 맞지 않는 직장 생활을 그만둔 후 뭔가 특별한 삶이 찾아오길 기대했지만 그런 건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걸 알게 된 후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이것저것 해보다 보니 그럭저럭 먹고살만하게 되었고, 그 결과 아직 불행하진 않다는 내용이었다. 덤덤한 목소리로 퇴사 후의 삶과 자신의 살아가는 방법을 말하는 모습이 멋졌다. 그래서 수필가 김보통 작가의 팬이 되었다. 웹툰 작가인데 웹툰보다도 이 사람의 다른 수필집이나 강연 등도 찾아보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 김보통 작가가 우리 집 코앞에서 강연을 했다! 팬으로서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걸 하자.
싫지 않은 걸 하자.
기대하지 말자.
남의 기대에 부응하지 말자.
이 네 가지 결심이 김보통 작가의 새로운 삶의 모토라고 했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대기업에 들어간 후 자신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회사를 나와서 저 네 가지를 지키며 사는 지금이 얼마나 살만한지를 이야기해주었다. 남들 눈을 상관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해 나가라고.
즐거운 일을 꾸준히 해나가는 것의 중요성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한식 칼럼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글을 써본 경험도, 한식에 대한 경험도 많지 않았다. 다만 한식 공부가 즐거웠고, 기왕 공부하는 거 주제와 마감을 정해 조금 더 효율적으로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기회를 찾았고 요행히 기회가 주어졌다. 글도 한식도 초보임을 감안해서 체험과 인터뷰를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지만 그래도 굉장히 어설펐다. 무슨 내용을 얼마나 써야 한다는 감도 없었고 글도 형편없었다. 지금도 그때 글을 보면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다. 그때도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글 쓰는 게 너무너무 힘들었다. 짤막한 글 하나를 쓰는데 일주일 씩 걸렸다. 하지만 좋았다. 배워가는 재미가 있었고, 내가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도 신기했다. 부족한 글을 공개하는 게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못 쓴다고 손해는 없었다. 어차피 아무도 안 읽던 글 계속 아무도 안 읽을 뿐이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지났다. 이젠 찾아서 읽거나 칭찬해주는 분들도 생겼고, 글도 한식 지식도 많이 늘었다. 이 모든 걸 떠나서라도 그동안 혼자 공부하고 즐거워하던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
하지만 '기대하지 말자'는 부분은 좀 더 노력해야 할 부분이다. 가끔 칼럼을 쓰는 게 괴로워질 때가 있다. 글이 나 자신의 기대에 못 미쳐 괴로울 때도 있고, 남들에게 더 인정받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괴로울 때도 있다. 오로지 나를 위해서 즐거워서 시작한 일이고, 그랬기 때문에 지금까지 계속 해올 수 있었다. 그런데 나 자신의 기대나 남들의 인정 때문에 괴롭고, 그래서 글 쓰기가 힘든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말이 안 되는데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김보통 작가는 기대하지 말라고 한다. 잘 그리고 잘 쓴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부담이 없고, 부담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일을 수월하게 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분명 필요한 마음이다. 부담이 없으면 결과물도 좋고 (대학교 때 과제를 할 때도 하루 동안 고민해서 쓰는 것보다 맥주 한 잔 하고 부담 없이 쓰는 게 더 성적이 좋을 때가 많았다...) 그렇게 많이 쓰다 보면 경험치도 쌓이기 마련이다.
강연 날은 마침 8년 간의 회사 생활을 잠시 중단하고 산전 휴가를 시작한 첫날이었다. 아침에 알람도 없이 6시에 깨서는, 이제 회사를 안 가는 만큼 뭔가 더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이제 아기가 태어나면 여유가 없어질 텐데 그전에 공부도 더 많이 해놓고 글도 더 많이 써놔야 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딱히 하고 싶거나 해야 할 일도 없었는데 말이다. 휴식을 취하는 것도 지금만 할 수 있는 일이라며 가까스로 스스로를 다잡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를 쉬다가 김보통 작가를 만났다. 조바심이라는 것도 기대와 욕심에서 오는 일인데, 의미 없이 조바심만 내는 게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진심으로 들었다.
좋은 타이밍에 필요한 강연을 잘 들었다. 앞으로도 마음이 조마조마해질 때가 있겠지만, 쉬는 첫날 이런 강연을 들은 건 조바심 내지 말고 기대하지 말고 살라는 하늘의 뜻이다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으며 지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