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주차] 고민의 연속, 기로 플래터

음식임신일기

by 솜대리




임신을 하면 자다가도 떡볶이가 생각나서 남편을 깨운다더니. 어느 날 갑자기 뉴욕에서 먹었던 기로 플래터가 생각이 났다. 몇 번 먹어보지도 않았는데 왜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기로 플래터는 중동의 음식, 도너 케밥의 일종이다. 도너 케밥은 중동식 고기 바비큐 중 하나로 요즘 우리나라 길거리에서도 가끔 만날 수 있다. 고기를 각종 향신료로 양념해 긴 막대기에 꽂고, 이 막대기를 세로로 세워 돌려가며 굽는다. 익은 고기를 겉부터 저며내어 각종 소스와 야채를 곁들여 먹는다. 얇은 빵에 샌드위치로 먹거나, 밥과 여러 부재료를 함께 곁들여 플래터로 먹는다. 도너 케밥은 20세기 중동 이민자들에 의해 미국과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그리스에서는 도너 케밥에 그리스 음식인 피타 브레드와 타지키 소스를 곁들였는데, 이런 그리스식 도너 케밥을 기로(Gyro)라고 부른다. 그리스가 아닌 미국에서도 길거리 음식으로 많이 먹는다.


도너 케밥을 자르는 모습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뉴욕에도 기로를 파는 노점상이 많은데, 그중에도 맨해튼 미드타운의 할랄가이즈가 특히 유명하다. 이집트 이민자가 시작한 이 노점상은 뉴욕의 택시 기사들에게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유명해졌고, 지금은 세계적으로 200개 매장을 대형 업체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성장한 후에도 노점상으로 운영하던 본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뉴욕 관광을 가면 꼭 먹어야 할 음식으로 손꼽힌다.


뉴욕 할랄가이즈 본점의 모습 (사진 출처: 할랄가이즈 페이스북)


나도 뉴욕에 처음 갔을 때 할랄가이즈 본점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기로 플래터를 처음 먹었는데 이국적인 향신료, 핫소스의 매콤함, 화이트소스의 고소함이 잘 어우러져 맛있었다. 부드럽게 익은 고기와 아삭한 양배추의 조화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뉴욕 한복판에서 뉴욕의 길거리 음식을 먹는다는 기분이 좋았다.


한국에도 할랄가이즈 체인점이 생기긴 했지만 집과 멀었다. 처음 생겼을 때 한 번 가봤지만 아무래도 현지 맛과 조금 다르고, 뉴욕의 길거리에서 먹는다는 색다른 기분도 없었다. 그래서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지만 어림없었다. 집 가까이서 파는 케밥으로 나를 달래 보려 했지만 되지 않았다. 귀찮음과 먹고 싶음 사이에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퇴근길에 혼자 강남역에 들렀다.


처음부터 고민으로 시작한 이번 먹방은 정말 고민의 연속이었다. 테이크아웃 여부부터 고민이었다. 테이크아웃을 해서 금요일 저녁 강남역에 사람이 더 몰리기 전에 집에 가고 싶기도 했지만 여기까지 오는 길에 이미 좀 지쳤다. 여기서 저녁을 먹으면서 쉬고 갈까 하다가, 그래도 역시 만원 지하철에 탈 자신이 없어 테이크 아웃을 했다. 이후에도 1인분을 살까 야근하는 남편 몫까지 2인분을 살까, 2인분을 사면 1인분짜리 2개를 살까 2인분짜리 1개를 살까, 이걸 집에 가서 먹을까 집 앞 공원에서 먹을까, 버스를 타고 갈까 지하철을 타고 갈까 끊임없이 고민했다. 심지어는 모든 걸 결정하고 주문해서 나서다가, 다시 들어와 테이크 아웃을 매장에서 먹기에 이르렀다.


이 날 먹은 기로 플래터


드디어 모든 결정을 마치고 기로 플래터를 먹었다. 하지만 마냥 좋지는 않았다. 음식은 괜찮았지만 이 음식을 먹기까지의 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테이크 아웃을 할지 말지, 어떻게 시킬지, 어떻게 집에 갈지, 내가 한 생각들 모두 해볼 만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고민할 일은 아니었다. 요즘 계속 이렇다. 사소한 일들을 끄집어내고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고민으로 만든다.


임신하고 몸이 좋지 않았고 어차피 휴직도 하게 되기 때문에 하던 일들을 많이 내려놨다. 자연스레 그와 엮여 있던 스트레스와 고민들도 많이 줄었다. 하지만 고민의 총량은 줄지 않은 것 같다. 진짜 고민들에 밀려 고민이 되지 않았던 생각들을 내가 나서서 고민으로 만들고 있다. 어쩌면 하루 고민의 양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닐까? 이럴 거면 계속 일을 하는 게 나았을까? 지금이라도 일을 벌일까? 어차피 고민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면 좀 더 양질의 고민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엔 관두기로 했다. 그렇게 하기엔 지금이 너무 귀하다. 이렇게 나만 생각할 기회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같다. 생각 많고 귀 얇은 나는 일도 주변 사람의 시선도 지나치게 신경 쓰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임신 덕분에 나도, 주변 사람들도 내가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것을 용인하고 격려해주고 있다.


이 기회를 더 잘 활용하기 위해 일도 과감하게 내려놓았다. 다시 다른 고민을 채워서는 귀중한 지금이 평소와 다를 게 없어진다. 고민을 하던 관성이 있다고 고민을 만들어선 안된다. 문제는 하루 고민의 총량을 줄이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참 감사한 나날들이다. 계획하고 오래지 않아 아기가 찾아왔고, 건강히 잘 자라고 있다. 주변 사람 모두 기뻐하며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아기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회사에서는 업무 조정을 해서 무리하지 않고 일할 수 있었고, 책상 없어질 걱정 없이 육아 휴직도 할 수 있다. 고민을 만들어 흐리기엔 너무 좋은 날들이다. 감사할 수 있을 때 충분히 감사하고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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