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주차] 기억에 없지만 추억에 남을, 오마카세 스시

음식 임신 일기

by 솜대리




임신 후기가 되면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더니 정말 그랬다. 31주 차. 임신 9개월을 코 앞에 두고 남편과 1박 2일 펜션 여행을 다녀왔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다시 단 둘이 여행을 가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멀지 않은 충남 서산으로 갔다. 해미읍성도 보고 백종원의 골목 식당에 나온 곳들도 갔다가, 예약해 둔 펜션에서는 레고도 하고 책도 읽었다. 임신하고 힘들었던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펜션에서 조립한 레고. 이 때까지만 해도 참 즐거웠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사건이 터졌다.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알 수 없는 액체가 주르륵 흘렀다. 갑자기 오줌싸개가 되거나 요실금이 온 건 아닐 텐데 하고 어안이 벙벙했다. 들여다보니 색도 없고 냄새도 없었다. 문득, 양수 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31주, 아직 양수가 터져선 안 되는 때였다. 급하게 병원에 전화를 해보니 양수면 계속 흐르니 지켜보라고 했다. 계속해서 흐르진 않았지만 다니던 병원에서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불안했다. 다시 흐른다고 그때 가서 병원으로 가자면 늦을 것 같았다. 일단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정신없이 체크아웃을 하고 차에 올랐다. 내비게이션을 확인하니 다니는 병원까지 예상 시간은 1시간 반이었다. 마음은 조급한데 병원이 너무 멀었다. "괜히 왔나 봐." 나도 모르게 후회하는 말이 나왔다. "오지 말걸 그랬어, 하지 말걸 그랬어 생각지 말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만 생각하자" 남편이 답했다. 남편 말이 맞았다. 어떤 상황이든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얼른 병원에 가는 것 밖에 없었다. 이상한 생각들을 하느니 아침이나 챙겨 먹어야 할 것 같았다. 휴게소에 들러 간단한 아침거리를 사서 차 안에서 입에 밀어 넣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외에는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짧게 입원할 경우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을 뿐이다. 보통 같았으면 라디오라도 틀었을 텐데 이번엔 둘 다 가끔 서로의 손만 잡았다. 드디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나는 '아무 일 없는 거면 우리 기념 식사를 하자.'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전화를 해뒀기 때문인지 바로 진료를 볼 수 있었다. 초음파로 양수와 아기 상태를 보고 분비물 검사도 했다. 긴장하고 있는 우리에게 의사 선생님은 아무 문제없다고 했다. 아. 막혔던 숨통이 뚫리는 느낌이었다. 아침의 액체는 분비물의 일종일 수 있다고 했다. 여전히 의아하긴 했지만 중요한 건 아무 일 없다는 사실이었다.


병원에서 나와 시계를 보니 1시였다. 아침도 대충 때웠지만 배가 전혀 안 고팠다. 그래도 먹어야 했다. 아까 얘기한 기념 식사를 핑계 삼아 점심을 챙겨 먹기로 했다. 내가 여름 내내 가고 싶다 노래를 하던 초밥집이 근처였다. 날만 서늘해지면 가겠다고 벼르던 곳이았다. 초밥이 먹고 싶다기 보단 다른 곳이 떠오르지 않아 그곳에 가기로 했다. 전화를 해보니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그 날의 초밥


오마카세를 시켰고 맛있어 보이는 초밥들이 차례로 나왔다. 셰프 분도 친절했고 서비스도 좋았다. 여름 내내 소원하던 그 식당의 그 음식이 원하던 대로 눈 앞에 펼쳐졌다. 그런데 정말이지 아무 맛이 안 났다. 맛있을 게 분명한데 별 맛이 안 느껴졌다. 속도 허전한 상태였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먹다 보면 달라지겠지 했는데 마지막까지 그랬다. 뭘 먹었는지,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주는 대로 먹다가 집에 왔다. 뭐든 맛있게 잘 먹는 남편이지만 어땠냐고 물으니 남편도 '그냥 괜찮았어.' 한마디뿐이었다.


기력이 없어 침대에 잠시 누웠는데 잠이 들었나 보다. 시계를 보니 2시간이 지났다. 옆을 보니 남편도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다. 긴 하루였다. 1박 2일 힐링 여행은 정신없이 마쳤고, 고대했던 오마카세 스시는 기억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말없이 손 붙잡고 달려온 1시간 반이, 고대했던 식사가 남편도 나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잠들어 버린 지금이, 꽤 오래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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