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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인생의 재발견 #01.중년이라는 새로운 출발선

  11월 중순의 어느 날 아침, 무거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지난주 부문 대표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못내 찜찜했지만 그래도 ‘설마’ 하는 마음이 더 컸다.  

  “사장님이 찾으십니다.”  

  오전 9시 무렵 사장 비서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로 곤혹스러운 자리였다. 무언가에 세게 얻어맞은 듯 머리가 멍했다. 어떤 생각이나 감정도 사라져 버린, 모든 게 마비되고 정지된 공간에 들어 선 그런 느낌이었다.  

  미안하게 됐다는 말을 뒤로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앞자리 직원에게 빈 박스 두어 개를 부탁했다. 얼마 되지 않는 개인 짐을 주섬주섬 박스에 담았다. 그리고 함께 일하던 팀장들에게 내가 ‘벼락’ 맞았음을 알렸다.  

  “박스는 택배로 좀 보내주라.”  

  20여 년 직장생활의 마지막은 그렇게 단출했다.


  나는 ‘회사 인간’이었다. 일 자체를 좋아했고, 일을 통해 얻는 경험과 성취감을 즐겼다. 직장에서의 성공이 곧 인생의 성공이라고 여기며 열심히, 치열하게 살았다. 야근과 주말 출근은 기본이었고, 남들 다 간다는 여름휴가도 제대로 챙겨 본 적 없었다. 그래도 그 덕에 다양한 업무와 인간관계를 경험했다. 정신없이 바쁜 직장생활 속에서 나는 회사와 명함이 곧 나의 삶이자 나를 증명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벼락은 소위 조직에 대한 충성심을 검증받은 사람들이 맡는다는 인사본부장 시절에 떨어졌다. 내 나이 겨우 40대 중반이었다. 상상도 못 해봤던 일, 회사에서 퇴출당하는 것은 충격과 공황 그 자체였다. 매일같이 출근하던 장소가 사라지고 규칙적인 생활도 무너졌다. 해야만 하는 일들로 분주하고 바쁘게 채워졌던 일상이 퇴직과 동시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바깥세상은 변한 게 하나도 없는데, 집에 홀로 앉아 텅 빈 스물네 시간을 채워야 하는 외롭고 공허하고 당혹스러운 일상을 마주했다. 밤이면 아파트 베란다에 우두커니 서서 창밖을 내다봤다. ‘내일 뭐하지?’, ‘뭘 해서 먹 고살지?’가 제일 고민이었다. 불안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내 처지가 보잘것없어지자 마음도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출근 시간 이후 아파트에서 만나는 주민들의 시선에도 위축됐고, 대낮 마트에서 마주치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도 불편함을 느꼈다. 친한 친구,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이인 아내에게도 이런 복잡한 심경을 표현할 수 없었다. 직장에서의 성공이 내 유능함의 상징이 었다면, 직장에서의 퇴출은 무능함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초라해진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니, 보일 수 없었다. 그래서 숨고 피하고 도망쳤다.


  그렇게 6개월 이상을 백수로 지냈다. 일을 해야 하고, 돈벌이도 해야 했지만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해야 할 일이 없었던 게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청년기를 월급쟁이로 보내면서 꽤 오랜 시간 동안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는 데 급급하며 살아왔다. 그러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허허벌판에 떨어져 혼자서 방향을 잡고 먹거리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였으니 두 발이 땅에 달라붙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 어찌 보면 무리도 아니었다.


  다행히 나에겐 멘토가 한 사람 있었다. 첫 직장 선배이자 인생 선배이기도 한 그는 암울한 시간을 보내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어느 날 바람이나 쐬자며 먼저 연락을 해왔다.  

  “무슨 계획이 있어?”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직장 다닐 때 가장 좋아하고 잘했던 일은 무엇이었는지,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신나고 에너지가 넘쳤는지,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 일이 진짜 하고 싶은지 생각해봐.”


  그랬다. 생각해보면 이젠 게임의 룰이 변했다. 내게 더 이상 주어진 과제는 없었다. 온전히 스스로 찾아내고 만들어내야 했다. 회사 인간으로만 살아왔던 나는 40대 중반에 완전히 새로운 환경을 만나게 됐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요구받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좀 더 전문적으로 하자는 생각이었다. 물론 배움이 주는 흥미로움과 즐거움도 컸지만 40대 중반에 시작한 박사 공부는 결코 쉽지 않았다. 복잡하고 어려운 영어 논문, 낯선 연구방법과 통계, 4일 내내 이어지는 수업도 힘들었지만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과정을 수료하는 3년 동안 생업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었다. ‘가진 재산도 없이, 중학생인 두 자녀를 키우면서 박사 과정을 다니는 고학생’이라고 농담처럼 나를 소개하기도 했지만, 그때의 나는 삶의 중심을 잃지 않고 쓰러지지 않기 위해 매일같이 고군분투했다.


  시간은 참 성실하게 흐른다. 내가 벼락을 맞아 퇴출당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하고, 동료들과 연구소를 만들면서 아등바등 사는 사이, 동년배 남자들의 시간도 그만큼 흘렀다. 누군가는 명예퇴직을 했고, 누군가는 보직을 빼앗겼다. 또 누군가는  직장에서 언제 필요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힐지 몰라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중년 남자들은 점점 조직의 중심에서 밀려 존재감이 사라져 갔고, 그만큼 자존감은 낮아졌다. 또 더 이상 승진이나 보직을 받을 가능성이 낮아지면서 퇴직에 대한 불안감과 걱정도 많아졌다. 그래서 남은 회사생활을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까에 온통 관심을 집중한다. 여기에 흰머리와 잔주름은 자꾸 늘어나고 머리카락은 빠지고 체력은 떨어진다. 팔팔하던 청년들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어느새 중년이 되었고, 심신이 약해졌다. 직장생활에 대한 의미와 재미가 없어지면서 일상은 도돌이표가 되고, 낯선 신체의 변화도 발목을 잡으면서 자신의 삶에 새로운 자극을 만들 에너지도 사라졌다.  


  지금 한국 사회의 40~50대는 윗세대 선배들이 밟았던 삶의 경로와는 다른 길을 밟고 있다. 이들은 불안정한 사회 · 경제 구조와 맞물려 개인적인 영역, 직업적인 영역 그리고 가정 영역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낯선 도전들에 직면해 있다. 그래서 40대 이후의 삶은 더 이상 안정적이지 않고, 50대 이후의 삶은 불안하기만 하다. 인생의 내리막길에 접어든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삶이 시작되는 것인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중년에 접어든 모든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고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 혼란과 그 불안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이 시기에 남자들이 해야 할 일은 시간을 현명하게 보내면서 새로운 문을 여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다. 물론 참으로 어렵지만.


  이 책은 우연과 필연을 넘나들며 내가 경험했던 것들에서 출발했다. 거기에 함께 중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여러 남자들의 스토리가 더해졌다. 이 책을 통해 나 자신과 또래의 중년 남자들에게 불확실한 미래로부터 삶의 새로운 길을 찾는 ‘자기 탐색과 발견’의 과정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은 목적지만 입력하면 자신의 현재 위치를 자동으로 탐색해서 경로를 안내해준다. 하지만 우리네 인생은 목적지는 물론이고 자신의 현재 위치도 스스로 탐색해야만 하고, 이것을 토대로 여러 선택지 안에서 스스로 경로를 결정해야 한다. 쉽지 않지만 언젠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래서 중년의 시간을 건너고 있는 남자들에게 자신이 지나온 삶의 발자취를 스스로 되돌아보는 과정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 Carl Gustav Jung은 “사람은 자신의 가슴속을 들여다볼 때 비로소 시야가 트이게 된다. 바깥을 보면 꿈을 꾸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깨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금 인생의 중년기를 지나고 있는가? 그렇다면 자신이 어디를 향해 가고 싶은지 묻기 전에 과거의 나로부터 현재의 나 그리고 심리학이 알려주는 중년의 특징들을 한 번 들여다보자. 가야  할 곳을 알고 싶다면 지금 나의 위치를 먼저 알아야 한다. 이제부터 그 흥미롭고 가슴 뛰는 과정을 함께 시작해보자.



이 글은 저자의 책 '오십, 인생의 재발견' 서문입니다. 이 책에는 우리나라 중년 직장인들에게 일, 직장, 성공의 의미, 그리고 조직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퇴직하고, 이후 새로운 삶에 적응해가는 과정에서 ‘나’라는 사람의 존재를 찾아가는 스토리가 담긴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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