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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 Apr 07. 2023

대뜸 이사가겠다고 말하는 여자친구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

"나... 이사 갈까?" 


아들을 재우고 내 방으로 돌아와 남자친구와 따듯한 차를 마시다 문득 내가 말했다. 길고 긴 겨울방학이 끝나면 아이는 초등 2학년이 될 거고, 점점 엄마보단 친구들에게 많이 의지하게 되겠지. 근처 아파트들이 모두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어 아이 친구들이 하나둘 이사 가고 있고, 학교가 텅 비어가는 게 걱정이 되었다. 엊그제 근처 마트에서 '어쩜 이 학교 폐교될 수도 있다던데 정말일까?'라는 다른 엄마들 수다를 귀동냥으로 얻어들었더니 마음이 더욱 불편해졌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내뱉은 말이 '이사 갈까?'였다. 나는 대답이 없는 남자친구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예상대로 그는 '얘가 또 무슨 생각을 하다 이사 얘길 꺼내나'라는 표정으로 웃으며 나를 마주 보았다. 


"어디로 가려고?" 


"글쎄... 그건 생각 안 해 봤는데... 서울? 부산? 아니면 아예 외국은 어때?!" 


"음..." 


그는 당황조차 하지 않고 나를 관찰했다. 그 잠깐의 침묵조차 견디기 힘들어진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만약 서울에 가게 되면 아버지랑 이모도 계시고, 내 친구도 꽤 있으니 여기나 거기나 사는 건 비슷하지 싶어. 그치만 집값은 비싸겠지? 차도 많고 사람도 많고... 이 시골에서 사는 것보다 더 좁고 불편하게 살아야 할 듯... 아, 나 안 갈래. 다시 생각해 보니 답답해서 못 살아." 


"하하... 그래." 


그가 뭐라고 하든 나는 개의치 않고 손짓 발짓까지 동원해 가며 계속 주절거렸다. 


"부산으로 가면 어떨까? 어릴 적에 거기서 꽤 오래 살기도 했고... 바다 가까운데 살면서 자주 놀러 가면 좋겠네. 친구들도 많이 살고, 동네도 익숙하니까 금방 적응하지 않을까? 아 근데 공기가 너무 안 좋던데... 부산 갈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거든. 운전하기도 너무 험악하고... 아휴... 부산은 안 되겠어." 


남자친구는 이번에도 말없이 그저 웃었다. 


"외국으로 나가면 어떨까? 영어공부야 하면 되고... 아는 사람 하나 없지만 만들면 되지 뭐. 아님 중국으로 갈까? 거기서도 꽤 오래 살았으니 나는 잘 적응할 듯. 동네가 좀 위험하긴 한데... 그러고 보니 나, 중국 살던 때에 밤길에 칼 맞을뻔한 얘기 해줬던가?" 


"음..."


"아, 했었지 참... 한 다섯 번은 한 것 같다. 헤헤." 


"근데 기억이 잘 안 나." 


"그래? 그게 말이야. 어떻게 된 거냐면... 그때 내가 열..일곱 살 여름인가 그랬을 거야. 밤에 친구가 불러서 학교로 가던 길이었지...." 


남자친구는 아마 열댓 번은 더 들었을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 기울였다. 나는 그가 기억하고 있을게 뻔한 이야기를 신명나게 꺼내놓았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자 한 것도 없이 무척 뿌듯한 기분이 되었다. 


"... 그랬던 거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살았으니 된 거지 뭐. 그래, 중국은 너무 위험해서 안 되겠다, 휴... 이사 가지 말까?" 


"그럴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다시 눈에 불을 켜고 말을 이었다. 


"근데, 지금 사는 여기는 집주인이 2년 후에 이사 나가달라고 했었잖아. 자기들 여기 들어와서 살 거라고. 어딘가로 옮기긴 옮겨야 하는데... 이 주변은 전부 재개발 중이고 빈 집도 없고... 아 망했네, 어떻게 하냐..." 


"그러게..." 


난 곧장 휴대폰을 꺼내 근처 월세, 전세 가격을 뒤적거리다 남자친구에게도 링크 몇 개를 보내주었다. 월세도, 전세도 꽤 많이 올랐다. 지금 가진 돈으로는 이 근처에 괜찮은 전셋집을 구하기 어려워 보일 정도였다. 


"나... 그냥 집을 살까?" 


"음..?" 


"전세는 자꾸 오르고, 이사 가기는 싫고! 에휴... 근데 집 살 돈이 없지..." 


"그러게..." 


통장 잔고를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왜 가난한 거야... 아 열받아...' 


순간 전남편의 집이 세 채였다는 사실이 머리를 스쳤다. 이혼할 때 몸만 달랑 나올게 아니고 재산분할이랑 가정폭력에 대한 위자료 몇 푼이라도 받아 나왔어야 했는데... 나 자신의 어리석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물론 코끝이 좀 찡해지긴 했지만, 실제로 울진 않았다. 어쨌든 휘몰아치는 폭력에 안전하게 탈출한것만 해도 어디냐 싶어서 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나간 과거 붙잡고 징징대면 뭐 해, 그때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당시엔 전남편이 아이를 죽일지도 모를 상황이었고, 도망치고 안전하게 이혼하기까지 내 심신은 완전히 지쳐버려서, 재산에 대한 건 고려하지도 못했었다. 이건 나를 탓할 일이 아니다. 나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죄지은 건 딴 놈인데, 착한 나를 탓해서는 안 되겠지. 


음... 착한 건 맞는데, 이제 좀 가난한 착한 사람... 


"......" 


결혼 전에 모아놓은 돈은 결혼하느라 다 썼고, 혼수며 뭐며 그대로 두고 나왔으니... 게다가 아이 키우면서 가능하면 아끼지 않고 써대서 모은 돈이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지금도 아이가 결제해달라고 한 코딩학습이랑 중국어 학습기계 할부금이 매달 30여만 원 나가고 있고, 방과 후 수업에 매달 10만 원 넘게 결제되고 있다. 


"... 승오는 왜! 자기가 중국어 공부하고 싶다고 그렇게나 조르더니, 정작 결제해 주니 공부를 안 하는 걸까." 


"갑자기...?" 


부동산 매매에 대해 한참 얘기하다 아이의 학습으로 주제가 튀었다. 남자친구는 '얘가 또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다가 저기까지 간 거지...'라는 얼굴로 조용히 내 말을 경청했다. 나는 한참 승오 앞으로 들어가는 교육비를 계산하며 열변을 토하다 어느 순간 현실 자각 타임에 빠져들었다. 


멍하니 잡생각 속을 유영하는 텅 빈 내 동공을 들여다보던 남자친구는 잠시 기다리다 차를 권했다. 이번에 새로 구입한 생강청을 뜨거운 물에 타서 차로 만든 건데, 적당히 씁쓸하며 매운맛이 일품이었다. 


남자 친구는 마시는 척만 하는 걸 보니 입에 맞지 않나 보다. 사실 그는 아기 입맛이라 승오랑 쿵짝이 참 잘 맞는데, 커피보다 탄산, 차보다 주스를 선호했다. 


"야, 생강 싫어하면 말을 하지..." 


"아니 나 이거 좋아해. 엄청 맛있어." 


그는 고의로 호로록 소리를 내며 마시는 척을 했다. 


"됐어. 내가 두 잔 다 마시면 돼. 냉장고에 오렌지 주스 있는데 줄게, 기다려." 


주방으로 뛰어갔다 오며 싫은 소리 못하는 그에게 잔소리를 시작했고, 그렇게 대화가 얼렁뚱땅 마무리되었다. 어느덧 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나 혼자 어찌나 떠들었는지 목이 아플 정도였고, 다 식은 차를 물처럼 서둘러 마시고 이제 집에 돌아간다는 남자를 배웅했다. 텅 빈 집에 나 홀로 남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요의 시간이다. 


잘 생각해보면 떠든 것은 나 혼자인데 상담 센터라도 다녀온 양 마음이 차분했다. 남자친구는 아주 훌륭한 청자였고, 덕분에 태풍이 몰아쳐 중구난방이던 내 머릿속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그래, 뭐. 2년 후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답이 없는 문제는 그만 고민하자." 


승오를 재울 동안 남자친구가 청소를 다 해 둔 덕분에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창고 방에 들어가 그리던 그림을 마저 그렸다. 유화가 마를 동안 방으로 돌아와 잠이 쏟아질 때까지 책을 읽고 이윽고 잠자리에 들었다. 


중세 유럽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남자친구를 만나 같이 승오를 찾으러 떠나는 꿈을 꾸었다. 편안한 밤, 행복한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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