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지인이 이혼상담을 해온 적이 있었다.
“왜 이혼하고 싶어요?”
라는 내 질문에 그녀는 몇 가지 심각하고 또 사소한 이유를 나열했다. 곰곰이 생각하는 나를 보던 그녀가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그런 고통들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이제는 행복해지고 싶거든요.”
그녀의 입이 다물어지기 전에 나는 곧장 대답을 내놓았다.
“이혼을 하고 말고는 중요한 게 아니에요. 행복해지고 싶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 생각이야 말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어요.”
그러자 상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어째서냐 묻는 얼굴에 나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언젠가의 미래에서 행복을 찾지 마세요. 그건 과거에도 미래에도 없어요. 지금 당신은 행복하니까요.”
지인은 궁금증이 어린 목소리로 무슨 의미인지 물었다. 나는 아주 명확하게 말할 수 있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 그거야 말로 우리에게 독이 된다. 무슨 이유로 이혼을 하던, 혹은 이혼을 하지 않던, 아이가 있건 없건, 어떠한 조건 속에 있건 간에 중요하지 않다.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따라 해 보세요.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
“그래요. 그거에요!”
얼떨떨해 보이는 지인의 모습 위로 이혼 전의 내 모습이 겹쳐보였다. 이혼해도 괜찮을까? 막연하게 그런 불안증에 시달렸던 시기가 내게도 있었다. 나는 아이도 있는데, 괜히 후회할 결정을 하는 건 아닐까? 아이에게서 아빠를 빼앗는 선택을 해도 정말 괜찮은 걸까..? 나는 뭐든 열심히 배우는 성실한 우등생이었지만, '후회를 덜 남기는 선택'에 관해 배운 적은 없었다.
남편이 아이를 때리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그것은 누가 봐도 자명해보였다. 그렇다고 '이혼'은 쉽게 고를 수 없었던 선택지였다. 그가 아이에게 주먹을 휘두를 때, 몸을 날려 막을지언정, 별거를 입에 올리고 시간을 갖자 말할지언정, 차마 '이혼 하자'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빠 없는 아이'로 자라면서 아이가 느낄 결핍, '쟤 아빠 없대'라는 소릴 듣고 친구들에게 상처받는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조여들었다.
친정의 가족들은 쌍수를 들고 반대했다. 참 우스운 일이었다. 정작 자신들도 이혼한 주제에. 친정 엄마는 아이 키우다 보면 좀 때릴 수도 있는 거라고, 부부싸움 하다보면 실수로 주먹 좀 휘두를 수도 있는 거라고 남자 입장에서 목소리를 키웠다. 왼쪽 눈이 시퍼렇게 멍든 내 앞에서, 내 손을 잡고 서서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얼어있는 작은 아이 앞에서.
이혼을 적극 추천하는 무리의 지인도 있었다. '엄마가 아빠 역할까지 충분히 할 수 있어!'라던가 '그런 아빠라면 없는 편이 더 낫지. 애를 위해서 이혼하는게 맞아.'라는 의견도 꽤 있었는데, 그들 중 이혼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아마도 나는 그런 식의 조언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이혼 해보니까 이거 꽤 할 만하더라. 추천해!'
그런 고민에 빠져있던 무렵의 나는 분명히 불행했다. 탈출구를 찾고 싶었다. 누군가 내 손을 이끌어 빛의 길로 인도해주길 간절히 기도하기도 했다. 생전 처음으로 사주팔자를 보러 가고, 누가 봐도 사기가 분명한 단체에 기부금도 내고, 심지어 개명까지 강행했다. 모든 상황이 최악이었고, 어떻게든 좋아지게 만들고 싶어 발버둥 쳤다. 친정 엄마는 이혼을 반대했고, 남편이 폭력적으로 행동한데 내 탓이 있을거라며 나를 다그쳤다. 그렇게 믿음직스럽던 남편은 아이에게 손찌검을 하고 욕을 했고, 내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모든 게 끔찍했다. 그러나 폭력 후유증인지 야경증으로 밤새 소릴 질러대는 아이를 안고 심리 치료센터의 문을 두드리면서도 감히 이혼을 고르겠다는 결심이 서지 않았다. 나는 더 불행해지고 싶지 않았고, 이혼이라는 변화가 더 큰 불행을 가져다 줄까봐 무척 겁이 났다.
그때의 내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너는 지금 행복해.”
매일 눈물로 베개를 적시면서 머릿속에 들어찬 불행이 눈앞을 가리는 걸 못 본 체 했지만, 사실 그 무렵의 나는 꽤 행복했다. 이십대 후반, 나는 꽤 젊었고 힘도 넘쳤다. 얼마든지 직장을 구해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엄마와, 저는 얻어맞으면서도 엄마는 때리지 말라고 아빠에게 소리칠 수 있는 20개월 아들, 서로 끌어안을 수 있는 두 팔이 있고, 함께 걸어 나갈 수 있는 튼튼한 두 다리가 있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였고, 힘듬을 토로했으며, 서로의 쉴 곳이 되었다. 나는 아이가 있어서 더 힘을 낼 수 있었다. 아이가 없었다면 맥없이 고통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다 힘없이 늙어갔을지 모른다. 아이를 지키고자 악바리같이 힘을 냈고, 걱정 시키지 않기 위해 매일 웃었다.
그러니까 불행보다는 행복에 가까운 삶이었다. 그때의 나는 그걸 몰랐다. 나는 행복하다, 그 말을 주문처럼 외웠더라면 조금 덜 울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지금은 매일아침 눈 뜨면서, 하루를 살아가며 종종, 잠들기 직전에 이렇게 속삭인다.
“나는 행복해. 오늘도 너무 좋아. 이보다 더 좋을수가 없지!”
불행은 속눈썹에 매달린 물방울처럼 시야를 가린다. 당장은 대단히 커 보이지만 닦아내고 나면 한 두 방울의 물기일 뿐이다. 그것들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다. 당신이 지금 행복한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고작 두세가지의 불행들에 속지 말자.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하며 행복을 미루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혼을 준비 중이라면 당신은 행복하다.
새로운 삶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이혼을 포기했다면 당신은 행복하다.
변화에 걱정할 필요 없이 편안한 삶이 이어질 것이다.
이혼을 고민 중이라면 당신은 행복하다.
어느 쪽이 더 나을지 가늠해 봐야 할 만큼 저울이 평평하다는 의미이니 어느 쪽을 골라도 행복할 것이다.
재혼을 해도, 또다시 이혼을 해도, 아이가 있어도, 아이가 없어도, 어떤 일이 닥쳐도 당신은, 나는, 우리는 행복하다. 행복은 어떤 조건이 갖춰진 미래에 있는게 아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 당신이 행복한 수많은 이유를 부디 잊지 않기를 바란다. 나처럼 의식적으로 말을 내뱉어 봐도 좋을 것이다. 하루 세 번, ‘나는 행복해. 지금 이 순간이 너무 만족스러워.’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만으로 삶의 질이 바뀐다.
갈증에 시달릴 때 물이 없다면 무척 안타깝고 불행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적으로 물을 마시면서도 감사하다거나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발을 새로 살 돈이 없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신발을 신을 두 발이 있음에 감사하지는 않는다. 아이 때문에 이혼하기 꺼려지고 이혼 이후의 삶이 고되다며 불행을 말하지만, 사실 그 아이 때문에 더 힘을 내고 노력하는 삶을 살지 않는가. 이미 당신은 모든 종류의 행복을 가지고 있다.
내게 고민 상담을 해왔던 지인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에겐 건강한 아이가 있고, 튼튼한 몸이 있다. 발을 디디고 선 그곳, 그 순간에서부터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그녀도, 나도,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이 글을 읽는 모두가 그 모든 순간 행복에 충만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